한국산(産)이 아니어도 한류가 되는 시대
- 단순 수출을 넘어 ‘초국적 한류’ 시대로 -


< (좌) 필리핀 벤치 모델인 배우 안효섭 / (우) 리바이스 모델인 블랙핑크 로제 - 출처: 통신원 촬영 >
최근 마닐라 도심은 물론 필리핀 소도시 쇼핑몰을 걷다 보면, 한국 문화를 접하는 것이 숨 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음을 실감하게 된다. 대형 쇼핑몰에는 필리핀 현지 브랜드 홍보모델로 발탁된 한국 연예인이 미소를 짓고, 쇼핑몰 내 푸드 코트에서는 삼겹살과 떡볶이를 즐기며 담소를 나누는 현지인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과거 소수가 즐기던 이국적인 한국 대중문화가 이제는 필리핀 국민 다수가 일상 깊숙이 뿌리를 내린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필리핀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체감은 올해 발표된 공신력 있는 지표를 통해 더욱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KOFICE)이 발표한 「2026년 해외한류실태조사」 결과는, 오늘날 한류가 어떻게 타국 일상과 결합하여 이전과 다른 모습을 만들어내고 있는지, 그리고 그 파급력이 얼마나 강력하게 진화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이정표가 되고 있다.
이번 실태조사에서도 눈에 띄는 대목은 한국 문화콘텐츠를 접한 외국인 가운데 약 70%인 69.7%가 한국에 대해 호감을 갖게 되었다고 응답한 점이다. 국가별로는 필리핀이 87.2%로 전체 1위를 기록해 ‘동남아시아 한류의 심장’임을 증명했으며, 이어 인도(83.8%), 인도네시아(82.7%), 태국(79.4%) 순으로 높은 호감도를 나타냈다. 전문가들은 필리핀에서 한국 문화콘텐츠가 압도적인 호감을 얻고 있는 이유로 한류 소비의 ‘확장성’에 주목한다. 과거 음악과 드라마 등에 국한되었던 것이 이제는 화장품, 패션, 그리고 음식에 이르기까지 일상 영역으로 완벽하게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을 대표하는 연상 이미지로는 여전히 케이팝(17.5%)이 9년 연속 1위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 소비 지표를 들여다보면 실제 양상은 다른 면이 있다. 가장 인기 있는 한류 분야 설문에서 ‘한국 요리(55.1%)’가 음악(54%), 미용(52.6%), 드라마(51.3%)를 제치고 가장 앞에 올랐으며, 실제 경험 비율에서도 한국 요리는 78.0%라는 압도적인 수치로 1위를 기록했다. 이는 필리핀 내 외식 산업 변화와도 정확히 일치한다. 마닐라를 넘어 지방 소도시까지 이른바 ‘무제한 삼겹살(Unli-Samgyeopsal)’ 식당이 대중적인 가족 외식을 위한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현지 편의점이나 슈퍼마켓에서 한국산 라면, 소주, 즉석조리가 가능한 떡볶이를 구매하는 것은 특별한 날이 아닌 평범한 장보기가 되었다. 케이팝 콘서트 관람이나 드라마 촬영지 방문이 상대적으로 높은 비용과 시간을 요하는 일이라면, 한국 라면을 끓여 먹거나 삼겹살을 굽는 행위는 누구나 부담 없이 시도할 수 있는 일상 영역이다. 일상 속에서 쉽게 시도할 수 있는 음식 문화 확산이 한국 대중문화와 한국에 대한 호감을 끌어올리는 가장 강력한 요인으로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 필리핀에서 판매 중인 탕후루 - 출처: 통신원 촬영 >
나아가 이러한 일상 속 한식 소비의 확장은 단순히 한국 제품을 구매하는 것을 넘어, 현지 문화와 결합하는 ‘융합’과 ‘현지화’의 단계로 진화하고 있다. 한국식 삼겹살 뷔페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최근에는 현지인들이 직접 창업하고 운영하는 한국식당과 프랜차이즈가 빠른 속도로 증가하며 ‘현지화’된 한식을 선보이고 있다. 또한 크로플, 마라탕, 탕후루, 핫도그, 마늘빵, 오마카세 등 본래 한국에서 시작되지 않은 음식들도 한국이 유행에 미친 영향이 크다. ‘한국식 변형’과 ‘소셜 미디어를 기반으로 한 한국 젊은 세대의 소비 문화’가 동남아시아 등 해외 시장으로 수출되어 새로운 유행을 만든 사례라 평가할 수 있다.
음식 문화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 ‘한국식 시스템과 현지 문화의 결합’이라는 융합의 흐름은 대중음악 산업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된다. 필리핀 현지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보이그룹 ‘에스비19(SB19)’은 한국 기획사의 현지 법인이 발굴하여 한국식 방식으로 육성해 데뷔했다. 그러나 이들이 선보이는 음악은 단순히 케이팝을 흉내 내거나 번안곡을 부르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필리핀어 가사로 대중과 소통하며, 필리핀 청년들이 겪는 사회적 고뇌와 목소리를 담아냄으로써 공감을 얻었다. 에스비19가 성공적으로 안착한 이후 등장한 걸그룹 비니(BINI) 역시 마찬가지다. 비니는 한국인 전문가와 협업, 연습생 생활 영상 공개 등 한국식 마케팅 전략을 적극적으로 도입했으며, 데뷔 전부터 다양한 케이팝 걸그룹 노래를 자신들 방식으로 소화하며 영향을 드러냈다. 이처럼 두 그룹의 성공 배경에는 ‘한국식 제작 방식과 문화적 주체성 결합’이라는 융합의 맥락이 자리 잡고 있다.
음식과 대중음악 등 다방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러한 ‘융합콘텐츠’의 확장에 대해 현지 대중들은 매우 긍정적으로 반응하고 있으며, 이는 이번 실태조사 결과에서도 뚜렷하게 확인된다. 이러한 ‘융합콘텐츠’ 중 하나로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Kpop Demon Hunters)>가 있다. 이 작품은 한국에서 직접 제작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해외에서는 이를 ‘한국 문화콘텐츠’로 인식하고 있다. 응답자들은 이를 한국 콘텐츠로 인식하는 주요 이유로 ‘한국의 문화적 요소가 반영된 콘텐츠(23.3%)’, ‘한국 사람 다수 등장(21.8%)’, ‘한국이 배경(19.1%)’ 등을 꼽았다. 주목할 점은 이러한 ‘융합콘텐츠’에 대해 ‘매력적이다’, ‘트렌디하다’라고 응답한 비율이 각각 60.0%로 가장 높았고, ‘받아들이기 쉽다(57.3%)’, ‘독창적이다(55.0%)’라며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는 것이다.


< 한식을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는 필리핀 - 출처: 통신원 촬영 >
앞서 살펴본 현지화된 음식이나 에스비19의 음악,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사례처럼 외래문화가 한국을 거쳐 재구성되거나 생산 주체가 외국이더라도 한국적 요소가 결합된 콘텐츠는 이제 ‘초국적 한류(Transcultural Hallyu)’라는 거대한 범주로 묶인다. 과거 한류가 한국인이나 국내 기획사가 만들어 일방적으로 수출하는 원산지 중심의 형태였다면, 오늘날에는 한국적인 변주를 통한 '문화적 재구성 방식'으로 진화한 것이다. 해당 창작물을 즐길 때 작용하는 미적 요소와 감성이 ‘한국 문화’와 직접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2026년 해외한류실태조사」 결과와 현재 필리핀의 상황은 앞으로 대한민국의 문화 정책과 관련 기업들이 나아가야 할 명확한 방향을 제시한다. 필리핀에서 한국이 소비되는 방식은 이제 특별하거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밥을 먹고, 화장을 하고, 친구들과 여가를 즐기는 일상이 되었다. 따라서 관련 기업들은 과거처럼 일방적이고 수직적인 ‘콘텐츠 수출’ 방식에서 벗어나, 타 국가와 문화적 접점을 만들어내는 ‘융합콘텐츠’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지원할 것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해야 할 시점이다. 현지 일상에 부드럽게 스며드는 방식이야말로 지속 가능한 한류를 만드는 가장 강력한 열쇠가 될 것이다.
사진출처 및 참고자료
- 통신원 촬영
-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2026). 「2026년 해외한류실태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