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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40여개 나라에서 활동하고 있는 KOFICE 통신원들이 전하는 최신 소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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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코믹 드라마 "낭랑 18세" 방영 시작

  • [등록일] 2006-05-25
  • [조회]5338
 

한국 코믹 드라마  "낭랑 18세" 방영 시작

한류의 열풍으로 수입되기 시작한 한국 드라마가 제 3의 방송국인 AN TV에서도 방영되기 시작했다. 이 방송국은 그간 한국 드라마에 대해 인도네시아 시청자들이 높은 시청률을 보임에 따라 한국의 인기 드라마를 독점적으로 수입 방영하고 있는 인도시아르(Indosiar)나 Jakarta TV의  기세에 눌려 한국 드라마의 수입 기회를 갖지 못했었다.

AN TV에서 5월 첫째 주부터 방영되고 있는 이 드라마는 KBS에서 2004년 1월 19일부터 3월 9일까지 방영되었던 작품이다. 이동건과 한지혜가 열연한 코믹 드라마 "낭랑 18세"는 현지에서 "Little Bride"로 소개되어 매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현지 시각 낮 11시 30분에 방영되고 있다. 이동건은 이미 2005년에 인도시아르에서 방영한 ‘상두야 학교가자’를 통해 이미 현지 시청자들에게 조금은 익숙한 인물이다. 18세 고교생과 현직 검사의 사랑 이야기를 코믹하게 그린 이 드라마는 사랑을 주제로 한 기존의 다른 드라마와는 달리 젊은이들의 코믹한 사랑을 이야기한 것으로 현지 젊은 시청자 층의 관심을 끌 것이라 예상된다. 또한 현저하게 차이나는 나이와 사회적 지위를 두 남녀가 재미있고도 코믹하게 풀어 나가는 모습은 현지인들에게 새로운 한국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계기가 될 것이다.

한국의 모든 드라마들은 현지 인도네시아 방송국들이 이미 서양 드라마 혹은 홍콩, 인도의 그 어떤 작품보다도 앞 다투어 수입하려는 인기 품목이 되었다. 


독재에 항거했던 인도네시아의 위대한 문호 ‘쁘라무디야(Pramoedya)’ 별세

"나는 쁘라미스머주의자다. 나는 막시즘도 공산주의도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특정 가르침이나 교리를 신봉하지 않는다. 나는 단지 나 자신의 신념을 따른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사회정의와 복지를"
 
인도네시아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문호이자 오랫동안 인도네시아인으로서는 유일하게 매번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된 흔히 "쁘람"으로 불렸던 ‘쁘라무디야 아난따 투르(Pramoedya Ananta Toer)’ 가 30일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유족들에 따르면 그는 최근 며칠 동안 호흡기 질환과 가슴 통증으로 아무것도 먹지 못하다가 자카르타 동부에 위치한 딸네 집에서 숨을 거뒀다.

쁘라무디야는 1925년 2월 6일 중부 자와 불로라(Blora) 출생으로 인간 내면의 소리를 분출하며 식민지 정부의 비인간적인 면을 비판하는 작품을 네덜란드 및 일본의 식민지 시절부터 써왔다. 이런 성향은 1965년 시절 반공을 모토로 한 수하르토 정권이 들어서면서도 신정부의 독재적인 면을 비판하는 등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그의 작품성은 변하지 않았다.
 
신정부의 눈에 가시 같은 쁘라무디야는 이전 인도네시아 공산당이 만든 기관지 "레끄라(Lekra)"의 회원이었고 그의 작품성이 사회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었으며 또한 신정부 이전 당시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당원이었다는 이유로 결국 공산주의자로 몰려 악명 높은 "부루(Buru)"섬 감옥에서 1969년~1979년까지 10년간 옥살이를 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을 존중하는 정의와 사회 복지를 추구하는 사회주의자였을 뿐이며, 본인이 공산주의자라는 것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 

쁘람에게 부루 감옥에서의 10년은 자유를 잃어버린 암흑의 시간이긴 했지만 문학적으로는 최고 역작 4부작을 구상/완성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부미 마누시아(Bumi  Manusia: 인간의 대지), 아낙 스무아 방사(Anak Se mua Bangsa: 전 민족의 자식), 제작 랑까(Jejak Langkah: 발자취), 루마 까짜(Rumah Kaca: 온실)의 4부작은 비록 수하르토 독재 정권에서는 판금서로 그 빛을 발하지 못했지만 암암리에 독자들에게 알려졌고 해외에서 더 유명해져 그의 책들은 40여 개의 외국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로 보급됐다. 1979년 석방된 이후에도 끊임없는 집필활동을 하여 최근 까지 30여권을 완성했다.

쁘라무디야는 감옥에서 당한 고문으로 청력을 영원히 상실한 상태였기 때문에 영감이 떠오를 때마다 동료 수감자들에게 말로 이야기하면서 머릿속에 정리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귀가 들리지 않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웠던 것은 자신이 집필한 원고와 책들이 모두 불태워진 일이라고 회고했다. 쁘라무디야는 수감 당시 집과 재산을 모두 몰수당했으며 석방 후에도 수년 동안 가택연금 상태에서 여행도 금지 당한 채 답답한 세월을 보냈다.

한편 쁘라무디야는 심장이 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작가답게 대단한 골초였다. 특히 인도네시아만의 독특한 정향이 섞인 담배 ‘끄레떽(Kretek)’ 마니아로 2004년 3월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 당시에도 하루 2갑을 거뜬히 해치울 정도였다. 그는 당시 인터뷰에서 "끄레떽은 인도네시아의 맛"이라며 "만약 의사가 담배를 끊으라고 한다면 차라리 그를 쏴버리겠다. 이렇게 좋은 것을 왜 빼앗아가려 하느냐"고 큰소리를 쳤다. 국영통신 안따라에 따르면 쁘라무디야는 2차례 결혼 경력에 자녀 9명, 손자손녀 16명을 두고 있다.

통신원이미지

  • 성명 : 장은희[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인도네시아/자카르타 통신원]
  • 약력 : 계명대 미대 졸 한국어 강사 양성과정 수료 1987년 이후 인니거주(학원 경영 및 한국어강사) 현재) 국립 인도네시아 대학교 문과대 외국어교육센터 한국어 담당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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