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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수도에 대해 물으면 다들 마닐라라고 답한다. 그런데 마닐라는 좁은 행정구역을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고, 넓은 행정구역을 말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공식적으로 필리핀 수도는 마닐라시(City of Manila)이지만 상당수 관공서가 마닐라시 외 인근 다른 도시에 분산돼 있다. 이렇게 분산돼 있는 일대 행정구역을 지칭하는 용어가 메트로 마닐라(Metro Manila)다. 메트로 마닐라는 16개 시(City)와 1개 자치시(Municipality)로 구성돼 있으며, 원래는 별개 행정구역이었으나 1975년 11월 7일에 대통령령을 통해 '메트로폴리탄 마닐라(Metropolitan Manila)'라는 광역 행정구역이 됐다. 이후 1978년 6월 2일에 대통령령으로 메트로폴리탄 마닐라를 '필리핀 국가 수도 지역(National Capital Region, NCR)'으로 명칭을 변경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말라떼 성당 - 출처: 통신원 촬영 >
필리핀 통계청이 가장 최근에 수행한 인구주택총조사를 보면 2020년 5월 1일 기준 필리핀 인구는 1억 903만 명이며, 이 가운데 1,348만 명이 메트로 마닐라에 거주하고 있다. 메트로 마닐라는 인구 1,000만이 넘는 필리핀에서 유일한 대도시(Metropolis)로 정부청사와 교육기관이 밀집한 필리핀 최대 도시 케손(Quezon), 공단과 금융 지역이 있는 파식(Pasig), 마닐라만을 따라 호텔과 공항 등이 있는 말라떼(Malate)와 파사이(Pasay) 등이 있다. 말라떼에는 오래된 역사를 간직한 성당이 하나 있다. 말라떼 성당은 1588년에 세워진 것으로 1680년 석조 건물로 재건축을 거쳤고, 1762년에는 구조를 변경하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 중에는 건물 벽을 제외하고 모든 구조물이 불에 타는 등 수난도 당했지만 1950년대 재건축을 통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됐다. 말라떼와 연결된 에르미따는 필리핀 근현대사를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에르미따 지역은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는 필리핀 부유층과 외국인이 거주하던 곳이었으나 전쟁이 발발하면서 유흥가가 형성됐다. 에르미따는 잠시 유흥업소가 철거됐으나 2000년대가 되면서 다시 유흥가가 넓게 형성된 곳이다. 해당 지역에는 유흥가뿐만 아니라 국민 영웅인 호세 리잘을 기리는 공원과 미국대사관, 필리핀 국립미술관 및 자연사박물관 등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필리핀 소설 『에르미따(Ermita)』는 바로 이 지역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작품이다. 시대적으로는 1945년부터 1970년대까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작품을 쓴 작가는 1924년생인 프란시스코 시오닐 호세(Francisco Sionil Jose)로 필리핀 산토토마스대학교를 중퇴하고 기자 생활을 거친 뒤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영어권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필리핀을 대표하는 작가라 할 수 있다. 『에르미따』는 1988년 작품으로 한국에는 지난 2007년에 소개됐다. 소설 배경이자 한때 유흥가가 밀집한 지역은 에르미따 성당에서 말라떼 성당까지 거리 일대다. 에르미따 성당은 1571년 만들어진 건물로 1762년부터 1764년까지 영국 안전가옥 역할을 한 곳이기도 하다. 당시 성당은 목조건물이었으나 1918년에 지금과 같은 형태로 개축됐다. 하지만 1945년에 전쟁으로 성당이 완전히 파괴됐으며 이후 재건축에 들어가 1953년에 완공된 곳이다.
< (좌)2007년 한국에 출간된 소설 '에르미따', (우)에르미따 성당 - 출처: 통신원 촬영 >
소설 주인공 에르미따는 명문가 출신인 어머니 콘시타 로조가 일본군에게 강간을 당한 후 태어났다. 그를 숨기고자 했던 어머니 콘시타는 에르미따를 보육원에 맡기고 미군 중위와 결혼한 뒤 필리핀을 떠난다. 이후 성장한 에르미따는 출생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되고 이모 펠리시타스가 있는 저택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강간으로 태어난 에르미따는 집안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하인과 같은 취급을 받는다.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가문에 복수를 결심한 에르미따는 성적 매력을 이용해 권력가들에게 접근하고 어머니와 외가에 대한 복수를 시작한다. 그는 어머니가 필리핀에 돌아오자 어머니 남편과 잠자리를 하고, 어머니가 일본군에게 강간당했다는 사실 또한 그 미국인 남편에게 폭로한다. 에르미따는 동성애자인 외삼촌 정체를 세상에 공개하고 자신을 학대했던 이모에 대한 성적인 추문을 퍼뜨리면서 외가에 대한 복수를 철저히 단행한다.
호세 작가는 주인공 에르미따를 통해 필리핀 고위층과 현대사를 비판하고 있다. 작가는 필리핀 사회에 만연한 부패를 은유적으로 표현하며 에르미따가 매춘을 통해 만나는 인물들이 얼마나 비도덕적이며 부패했는지를 보여준다. 이를 통해 소외된 사회 계층과 권력이 가진 어두운 면을 조명하며 독자들에게 사회 비판적인 의미를 전달하고자 했다. 작가 스스로 말한 것처럼 이를 통해 상류층의 부정과 부패뿐만 아니라 필리핀 사회 전체의 부조리함을 그려낸 것이다. 작중에는 주인공 에르미따 동료였던 릴리아가 군부독재에 항거하다가 의문사당하는 장면도 있다. 릴리아가 죽기 전에 에르미따는 자신이 했어야 하는 일을 하는 아니타를 존경한다고 말하지만 이에 동참하지는 않는다. 어머니 남편인 미국인도 자신이 필리핀 사람이라면 혁명가가 됐을 것이라고 말하고, 작중 역사 교수인 크루즈는 암울한 필리핀 현실에 좌절하면서 자살한다.
크루즈 교수가 남긴 유서에는 아름다운 조국이 파괴되는 것에 대한 무력함 그리고 갈 길을 잃어버린 자신에 대한 회한이 담겨 있다. 그는 필리핀 앞날에 좌절하면서 인생에 종지부를 찍는다. 작가는 암울한 필리핀 현실과 미래를 그리면서 변화가 필요하지만 그 변화에 동참하지 않고 좌절하는 사람들에 대해 묘사한다. 작가는 소설에서 언급되는 매춘은 필리핀인의 부패와 타락에 대한 은유라고 표현했다. 28개 언어로 번역돼 세계적으로 소개됐지만 호세 작가는 정작 필리핀에서 저평가 된 소설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필리핀식 영어 글쓰기와 엘리트에 대한 비판적 시선 때문에 필리핀 주류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하는 지식인이다. 그는 언제나 작가들은 자신이 태어난 도시를 배경으로 도시 발전과 동시에 사람들이 저지르는 사회적 그리고 도덕적 몰락에 대해 그려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작가는 자신이 태어난 지역과 국가에 대한 사랑을 담아 현재보다 더 나은 미래를 염원하는 마음으로 글을 쓰고 있다. 지난 2011년 9월 12일에는 칼럼을 통해 고전 이해에 대한 소홀함으로 필리핀인들이 지적 그리고 문화적으로 수준이 떨어지고 있음을 아쉬워하기도 했다. 그가 바라는 것처럼 문학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기를 바란다.
사진출처 및 참고자료
- 통신원 촬영
- 《Philstar》 (2011. 9. 12). Why we are shallow, https://www.philstar.com/lifestyle/arts-and-culture/2011/09/12/725822/why-we-are-shall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