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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40여개 나라에서 활동하고 있는 KOFICE 통신원들이 전하는 최신 소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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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에서 한국인 이름 딴 공식 도로 탄생

  • [등록일] 2024-08-27
  • [조회]1111
 

1942년 수백 명의 조선인 청년들이 일본군을 따라 연합군 포로감시원으로 인도네시아에 왔는데 그중에 양칠성이란 남자가 있었다. 그는 격변하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서부자바 가룻(Garut) 지역 산속의 정글을 무대로 식민 종주국 네덜란드군과 싸우던 인도네시아 공화국군 유격대가 돼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나 1948년 8월 일본인 동료들과 함께 나포돼 반둥을 거쳐 자카르타로 압송됐다. 그운이 다한 것이다.

 

글로독(Glodok) 형무소는 일본이 패망하고 연합군이 진주한 후 전범 혐의를 받은 많은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이 수감됐다가 그중 일부가 처형당한 곳이다. 양칠성과 아오키, 하세가와가 이곳에 수감된 것은 그들 역시 인도네시아 유격대에 합류하기 전 연합군 포로들을 학대한 전범 혐의를 받았기 때문이다. 애당초 그들이 현지 유격대에 합류한 이유에는 종전 후 귀국까지 포기할 만큼 전범 혐의를 피하려던 의도가 최소한 몇 그램 정도는 있었을 것 같다.

 

그러나 양칠성과 그 동료들은 자카르타 시내의 또 다른 교도소인 찌삐낭(Cipinang)으로 이감됐고 얼마 후 멀고 먼 가룻으로 다시 이송돼 거기서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이 끝나기 직전 처형당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에서 독일군 군복을 입고 연합군에게 포로가 된 조선인이 있었다고 하는데 양칠성 역시 그 못지않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죽었다.

 

1970년대에 일본인 학자 우쯔미 아야코가 이들의 존재를 발굴해 낼 당시 양칠성은 야나가와 시치세이라는 이름의 묘비 아래 묻혀 있었는데 이후 죽은 지 20여 년 만에 조선인 양칠성으로 밝혀진 것이다. 네덜란드 군에게 나포당할 당시 저항하고 도주하다가 사살된 국재만이나 다른 동료 정수호를 비롯한 40명의 조선인 청년들도 어딘가에 매장돼 있겠지만 일본 또는 인도네시아 이름으로 돼 있을 것이므로 이들을 찾아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 뗀졸라야 영웅묘지에 묻힌 사람들. 1975년 맨 위 세 명이 양칠성과 그 동료들이다 - 출처: 통신원 촬영 >

 

가룻소재 뗀졸라야(Tenjolaya) 영웅묘지에 1975년 매장된 사람들 명단 중 양칠성의 이름은 꼼루딘(Komrudin)으로 표시됐다. 그의 인도네시아 이름 꼬마루딘(Komarudin)의 명백한 오기다. 그의 한국 이름 양칠성은 표시되지 않았다. 그와 함께 처형된 아오키와 하세가와 역시 각각 아부바카르(Abubakar)와 우스만(Usman)으로 표시돼 있다. 그들은 처형된 후 인근 찌누눅 공동묘지에 매장됐다가 신원이 밝혀진 후 1975년도에 뗀졸라야 영웅묘지로 이장됐으므로 1949년에 처형됐다는 정보만으로는 1975년 묘역에 묻힌 그들을 찾아낼 수 없다.

 

우쯔미아야코 박사가 발굴하지 못했다면 한국인들은 양칠성이란 남자의 존재 자체를 지금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이후 뜻있는 한국인 연구가들과 학자, 기관, 작가들에 의해 관찰과 기록이 이루어졌고 1995년에는 한인회와 공관이 주축이 돼 한국과 가룻에 남은 유족들을 불러들여 묘비를 새것으로 바꾸는 행사도 진행했다.

 

   

< 1949 5 24일자 네덜란드 신문 - 출처헨디 조 기자 제공 >

 

"1949년 5월 21일 아침 가룻에서 일본인 아오키(아부바카르), 하세가와(우스만), 야나가와(꼬마루딘, 양칠성)를 처형하고 당일 매장했다."는 내용이다. 이 증거는 8월 10일이라는 처형일은 물론 양칠성들이 처형장에서 기미가요를 불렀다는 에피소드가 모두 거짓임을 시사한다. 일각에서는 오히려 이들이 처형 전 마지막 소원으로 처형장에 붉은색 상의와 흰색 바지를 입고 나가게 해달라고 해 마치 인도네시아 국기를 상징하는 복장을 하고서 멜 깁슨 주연 영화 <브레이브하트> 속 13-14세기 스코틀랜드의 영웅 윌리엄 월레스처럼 '머르데카(Merdeka, 독립)'를 외치며 총탄에 스러졌다."고도 전한다.

 

헨디조 기자는 당시 목격자들이 고령으로 사망하고 그 후손들이 그곳을 방문하는 연구자들에게 당시 상황을 증언할 때 수고비를 좀 더 받을 목적으로 상대방이 감동할 만한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경향이 있다고 속삭였다.

 

사실 통신원은 양칠성과 그 일본인 동료들이 기미가요를 부르지도, 머르데카를 외치지도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열악한 환경의 감옥에서 오랜 수감생활을 한 그들은 피폐할 대로 피폐한 상태에서 절망적인 최후를 맞았으리라. 하지만 그들이 전범이 아니라 가룻에서 네덜란드군에게 적잖은 피해를 입힌 반군(독립군)으로서 처형당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서 그들은 가룻의 자랑이자 인도네시아인들의 영웅이 됐다. 그러니 이제 와서 그들이 기미가요를 불렀다거나 머르데카를 외쳤다는 이야기는 그저 현지 주민들의 립서비스로 치부하는 것이 맞다.

 

일제가 대한제국의 주권을 강탈한 1904년의 을사늑약, 그리고 1910년의 한일병탄조약은 불법이었고 1919년 4월 11일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으므로 당시 식민지 시대의 조선인들 국적은 일본이 아니라 대한민국이었다. 이건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식민지 시대 당시를 살던 사람들 모두가 그런 역사관을 갖고 있었기를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만약 굳이 따져야 한다면 그들의 '정체성'을 물어야 할 것이다. 한쪽 극단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은 일본의 침탈을 견딜 수 없어 국내외에서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벌인 이들이고 다른 극단의 사람들은 침략자들에게 빌붙어 그들의 국적과 이름과 외양을 따르며 그들의 이익을 위해 일본인보다 더한 일본인이 돼버렸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는 어쩔 수 없이 그 시대를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민초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왜 독립운동을 하지 않고 무력하게 창씨개명에 따랐으며 왜 일본이 원하는 대로 재산과 목숨까지 바보처럼 뺏겼냐고 책임을 물을 수 없다. 그런 걸 묻지 않아도 손기정 선수는 나라를 뺏긴 게 부끄러워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 우승 후에도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고 수많은 민초들이 이를 갈며 그 시대를 견뎌냈다. 그들을 반역자, 부역자라고 부를 수 없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이 프랑스를 수복한 후 샤를 드골 장군은 부역자들 수만 명을 즉시 처형했지만 나치 치하에서 목숨을 부지했던 일반 시민들은 처벌하지 않았다. 부역했다는 것과 살아남았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양칠성이 친일부역자라 비난하는 일각의 시각이 학계나 교민사회에 남아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앞서의 역사 인식과 정체성 논리를 전제로 그 시대의 양칠성과, 그와 함께 인도네시아에 포로감시원으로 왔다가 결국 귀국하지 못하고 현지 어딘가에 묻힌 수많은 조선인 청년들을 바라봐야 한다.

 

이날 가룻 탐방에 함께 나선 학자와 언론인들이 다 함께 양칠성의 무덤에 헌화한 것은 그가 꼭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라서가 아니다. 우린 그의 인간 됨됨이가 어떠했는지 어떤 실마리도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그를 참배한 것은 장수호, 국재만을 포함해 무덤조차 남기지 못한 그의 한국인 유격대 동료들을 함께 추모한 것이고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네덜란드와 맞섰던 빵에란 빠빡 유격대 동료들을 함께 기념한 것이다.

 

< 2024 8 22일 뗀졸라야 영웅묘지의 양칠성 묘소에 참배한 학자언론인들 - 출처통신원 촬영 >

 

가룻군청 관보에 따르면 2023년 11월 10일 가룻의 한 도로에 Jl. Komarudin(Yang Chil Sung)이라는 이름이 부여됐는데 이번 가룻 탐방은 이를 확인하는 것이 우선적 목표였다.

 

< 서부자바주정부 2023 11 12일자 관보빨간색 부분이 27번 양칠성 도로 - 출처가룻 군청 홈페이지 >

 

사실 가룻군이 보유한 영웅들이 27명보다 훨씬 많을 것이 분명한데 양칠성이 턱걸이하듯 27번 도로 이름으로 채택된 것은 현지 역사 협회 히스토리카 인도네시아의 끈질긴 노력 덕이다. 2016년 설립된 히스토리카의 주요 활동 중 하나는 저평가된 인도네시아 독립영웅들을 발굴하는 것인데 가룻의 지역 영웅들을 조사하던 중 만난 양칠성을 중점적으로 부각하는 데에 많은 힘을 쏟았다. 2018년부터 관련 세미나를 시작했고 2019년부터는 양칠성로 설치를 위해 가룻 군청과 오랫동안 설득했다. 따라서 2023년 11월에 이름 붙여진 양칠성로는 한국인도 아닌, 이들 인도네시아인들이 7년 만에 이뤄낸 성과다.

 

< 양칠성로관보에 따르면 이 도로의 길이는 1.76Kkm다 - 출처통신원 촬영 >

 

그 사이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고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모든 것이 전면 중단된 시기도 있었지만 그간 히스토리카가 끈질기게 양칠성로를 가룻 군청에 제안하고 한인사회의 뜻있는 이들이 이를 응원하고 지원하지 않았다면 양칠성로는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양칠성로는 차량 두 대가 가까스로 비껴 지나갈만한 좁은 도로지만 자바섬에 한국인 이름이 적혀 지자체장의 확인서(SK)까지 공식적으로 발행된 첫 도로가 됐다.

 

< 좌측부터 엄강심 UI 객원교수, 데일리인도네시아 대표 신청철, 편집장 조연숙히스토리아지 헨디 조 기자, 협회장 압둘 바시드 - 출처통신원 촬영 >

 

사진출처 및 참고자료

- 통신원 촬영

- 헨디 조 기자 제공

서부자바 주정부 홈페이지https://jabarprov.go.id/berita/bupati-garut-resmikan-nama-jalan-baru-11301

우쯔미 아야코 (2012) 『적도에 묻히다』 출판지: 역사비평사.

통신원이미지

  • 성명 : 배동선[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인도네시아/자카르타 통신원]
  • 약력 : PT. WALALINDO 이사, 작가,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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