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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와 한국 드라마
코로나19 팬데믹이 세상의 변화를 앞당기고 있다. 미래 어느 시점에 실현될 것이라 막연히 전망되었던 재택근무는 ‘거리 두기’ 정책에 따라 빠르게 정착했으며, 사회적 행동이 억제된 수용자들은 영화관과 공연장 대신 모바일과 OTT(Over-the-Top) 플랫폼을 통해 콘텐츠를 즐기고 있다. 흥미롭게도 한류는 새로운 단계로 발전하고 있다. 오랫동안 ‘아시아 안에서의 현상’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던 드라마의 경우 <킹덤>, <D.P.>, <오징어 게임>, <지금 우리 학교는> 등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의 형식으로, 과거 어느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수많은 나라에서 인기를 모으고 있다. 이 글에서는 1990년대 후반 이래 한류 현상 속 한국 드라마의 위상을 짚어보고, 한국 드라마의 인기 요인을 검토한다. 또한, 최근 한국 드라마가 글로벌 OTT에 기반해 전 지구적으로 확산하고 있는 상황의 함의를 살펴보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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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 이미지 출처: 셔터스톡/ Rokas Tenys
1. 한류와 드라마
얼마 전부터 ‘한류’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관광, 한식, 성형수술 등 다양한 기호와 이미지가 떠오른다. 이제 한류는 어느 하나의 모습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류를 선도해 온 것은 드라마다. 한류의 기원(起源)을 콕 집어 말할 수는 없겠지만, 1997년 중국 관영방송 《CCTV》에서 방영된 한국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가 큰 역할을 했다. 게다가 드라마는 관광, 한식, 한국어 등의 인기를 앞장서 이끌었다. <겨울연가>를 통해 눈 내리는 겨울과 가을 단풍에 대한 판타지를 갖게 된 동남아 수용자들은 먼 유럽과 호주 대신 한국으로 여행지를 바꾸었다. <겨울연가>의 촬영지 남이섬은 국내 단일 관광지 중 외국인 방문객이 가장 많은 곳이 되었으며, 남이섬을 배경으로 한 동남아 드라마와 영화가 다수 촬영되고 있다.
소위 K-푸드의 시작점도 드라마다. <대장금>을 보며 외국 팬들은 한국 음식의 진가를 알아보기 시작했고, <별에서 온 그대>와 <사랑의 불시착>에 자주 나온 ‘치맥(치킨과 맥주)’, <이태원 클라쓰>에 등장한 순두부찌개, 청국장과 짬뽕, <김비서가 왜 그럴까>가 소개한 돼지 껍데기는 해외 한국 식당의 주요 메뉴가 되었다. 사실 세계 여러 도시에 있는 한국 음식점도 <대장금> 이후 대거 등장했다. ‘설빙’과 ‘탐앤탐스’ 등의 한국 식음료 체인점을 해외에서 발견하는 것도 어렵지 않게 됐으며, 해외의 슈퍼마켓에서 김치, 라면, 떡볶이, 소주와 한국 과자도 쉽게 구할 수 있다. 케이팝 혹은 가요는 어떠한가. <나의 아저씨>를 감상하던 해외 팬들은 드라마에 삽입된 <어른>을 들으며 가수 Sondia와 다른 한국 가수의 노래를 찾아들었고, 아이유를 이제야 발견한 한류 초심자들은 이윽고 케이팝 팬덤으로 나아갔다. 게다가 해외 팬들은 한국 드라마를 보며 원어의 맛을 느끼기 위해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존폐 위기에 놓였던 외국 대학의 한국학 관련 강좌는 한류 팬/학생들로 넘쳐나고 있다.
2. 한국 드라마의 해외 인기
한류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현상이었다. 1990년대 말~2000년대 초, 국내 비평가들은 오랫동안 사회·문화적으로 폄하되던 한국 드라마가 중국, 대만, 홍콩, 베트남에서 인기를 얻었다는 사실에 쉽게 수긍하지 못했다. 해외 비평가들은 한국의 문화생산 능력에 의구심을 표해, 한류가 곧 시들 것으로 전망했다. 하지만 2003~2004년에 <겨울연가>가 일본에서도 큰 인기를 얻고, 일본의 중년 여성이 대거 한국을 찾아오며 배용준과 박용하 등 젊은 남성 배우들을 ‘욘사마’와 ‘욘하짱'이라는 애칭으로 ‘추앙’하자 한류에 대한 시선이 바뀌었다. 한류가 더는 중화권만의 현상이 아닌 문화산업이 발달한 일본에 역유통된 것이다.
그러나 <겨울연가> 이후 약 일 년간 새로운 한류 드라마가 나타나지 않자, 비평가들은 한류는 금세 사라질 것이라며 조롱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장금>이 아시아 전역에서 폭발적 인기를 끌며 한류 소멸론을 잠재웠다. 홍콩에서는 지상파방송 《TVB》에서 방송되어, 최종회 시청률 50%대를 기록했다. 대만 정치인들은 마치 1990년대 한국에서 당시 인기 대만 드라마 주인공 ‘포청천’을 선거에 이용했던 것과 비슷하게, ‘대장금’ 같은 정치를 하겠다고 선거공약을 내걸었다.
<대장금>의 성공으로, 2000년대 중후반 한국 드라마의 새로운 트렌드로 사극이 부상했다. 성공한 드라마가 가져올 ‘한류 관광 효과’를 확신하게 된 방송사들은 외주제작사와 함께 고대사를 배경으로 한 대작 드라마를 제작했다. 고대사에 사료가 많지 않다는 점에 착안해, 작가들은 2000년대 초반 당시 전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던 할리우드 영화 <반지의 제왕>과 비슷한 판타지를 만들어냈다. 한류 현상 덕에 드라마 제작비가 풍성해진 것은 호재였다. 《MBC》는 <주몽>에 300억 원을, 《KBS》는 <대조영>에 350억 원을, 《SBS》는 <연개소문>에 400억 원을, 김종학프로덕션은 <태왕사신기>에 387억 원을 투자했다.
이러한 ‘북방 사극’ 혹은 ‘고구려 드라마’를 포함한 사극 장르는 이란, 터키, 몽골처럼 역사와 전통을 중시하고, 과거 대제국을 건설했던 추억이 있는 국가의 시청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2007년 이란 국영방송 《IRIB》에서 방영된 <대장금>의 시청률은 90%에 이르렀으며, 2009년 같은 방송에서 방영된 <주몽>도 시청률 85%를 기록했다. <주몽>의 영향으로 한국 상품의 이란 내 선호도가 높아졌으며, LG전자는 주몽 역의 배우 송일국을 전속모델로 기용함으로써 이란에서 상당한 매출액을 올렸다. 이슬람 종교지도자가 상업문화를 거론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인데, 이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는 2016년에 자국을 방문한 당시 박근혜 대통령에게 “<주몽>을 자주 봤”으며, 많은 이란인들도 <주몽>을 좋아한다고 말했다(우경임, 2016). 이란과 같은 신정(神政)국가에서 한국 드라마가 인기 있는 이유는 한국 사극이 적당히 보수적이면서도 화려하고 재미있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반을 대표한 <가을동화>와 <겨울연가>가 순수하고 가슴 아픈 사랑을 그렸다면, 2000년대 후반 이후 <커피프린스 1호점>과 <꽃보다 남자>와 같은 드라마는 도시적 감성을 표현함으로써 젊은 층을 사로잡았다. 2010년대 이후, <태양의 후예>와 <나의 아저씨>, 그리고 <D.P.> 등 중년 남성 시청자를 매혹하는 드라마가 많아지며, 한류 드라마의 수용자 층은 남녀 구분 없이 전 연령대로 확대되었다.
어째서 한국 드라마가 해외에서 인기일까? 한류 초반에는 문화근접성(Cultural Proximity) 개념으로 한국 드라마의 인기를 설명했다. 당시만 해도 한류는 중국, 대만, 홍콩, 베트남 등지에서의 현상이었으며, 이 국가들은 한자문명권 혹은 유교문화권으로 등치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본질주의적인 관점에 근거해 한류는 동아시아적 현상으로 남을 것이라는 잘못된 전망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한류가 동아시아 너머로 확산하면서 문화근접성 개념의 타당성이 약해졌다. 대신에, 혼종성(Hybridity)을 한류의 인기 요인으로 많이 거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실 모든 문화가 혼종의 산물이라는 점을 깨닫게 되며, 한국 드라마 인기의 핵심적 이유로 혼종성을 거론하기 어렵게 되었다.
질문을 조금 달리해보자. 한국 드라마의 해외 인기란 무엇인가? 해외 시청자도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고,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즐거움을 느끼고, 그로부터 의미를 생산하는 현상이다. 이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인기’에 이르는 ? 인기를 ‘구성’하는 ? 요소를 다층위적으로 검토하자. 전 세계 드라마 시청자를 아우르는 공통성은 무엇인지, 국가마다 선호하는 한국 드라마가 다른 이유는 무엇인지, 한국 드라마 텍스트가 지닌 서사적 힘은 무엇인지 말이다.
첫째로, 드라마를 시청하는 세계 각 지역 수용자는 드라마에 대해 특정한 기대감을 갖는다. 이들은 오랜 기간에 걸쳐 미국 텔레비전 드라마를 시청하며 드라마 ‘리터러시(Literacy)’를 키우고, 미국 드라마를 참조해 자국 드라마를 생산했다. 이 ‘누적된, 미국 드라마 수용’이라는 요소의 중요성은 문화근접성 개념을 창안한 조셉 스트라우바(Joseph Straubhaar)의 이론에서도 확인된다. 그는 1970년대에 브라질 방송사 《TV 글로부(TV Globo)》가 인접국에 드라마(텔레노벨라)를 수출할 수 있었던 이유를 ① 이 방송사가 미국의 TV 제작 노하우를 성공적으로 지역화해 ‘미국’ 스타일과 ‘중남미’ 문화요소를 함께 갖춘 콘텐츠를 만들어냈다는 점, ② 오랫동안 미국 드라마 문법에 익숙한 중남미 각국 수용자들이 이 브라질 텔레노벨라를 문화적으로 편안하게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찾았다(Straubhaar, 1997). 한국 드라마도 20세기를 거치며 미국 드라마 문법을 학습했으며, 미국 대중문화를 토대로 해 성공적으로 지역색을 갖춘 일본 애니메이션/만화와 홍콩 영화의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문화 수용/전유’ 과정을 통해 한국 방송사는 한국적 스토리를 잘 버무려 ‘한국 드라마’라는 특유의 콘텐츠를 만들어낸 것이다. 한국 드라마를 시청하는 해외 팬들이 ‘유사한 특이성’ 혹은 ‘기이한 동질성’을 발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즉, 외국 시청자가 보기에 한국 드라마는 독특한 지역색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미국문화가 주도한 대중문화 감수성을 잘 담고 있어서 수용하기 쉬운 것이다. 물론 한국 드라마에 배우의 뛰어난 용모와 연기력, 스토리의 탄탄함과 재미가 담겨있음은 물론이다.
둘째로, 어떤 한국 드라마는 전 세계 모든 국가에서 인기가 있는 반면에, 특정 국가에서만 선호되는 드라마도 있다. 이는 수용국의 정치·사회·문화·종교·미디어 요인들이 수용자 개인의 취향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의 「2021 해외한류실태조사」를 보면 나라마다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는 이유가 다르다. 중국, 인도, 인도네시아에서는 “스토리의 짜임새”가, 일본, 대만, 태국에서는 “배우의 외모”가, 브라질, 프랑스, 터키에서는 “한국 생활/문화의 간접경험”이 한국 드라마 인기의 주요 요인으로 거론된다. 필자가 개인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일본 수용자들은 한국 배우의 외모와 한국문화의 독특한 매력을 선호 이유로 대지만, 싱가포르 팬들은 자국 드라마와 비교해 한국 드라마가 오락적으로 뛰어난 작품이라는 점을 선호 이유로 많이 댄다. 반면에,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팬들로부터는 한국 드라마를 통해 한국인의 근면성과 질서의식을 배울 수 있어서 좋았다는 답변을 많이 들었다. 더욱이, 다수의 동남아 수용자들은 문화가 근접해서 한국 드라마를 좋아한다는 대답 대신에 “문화는 다르지만, 한국 드라마의 세련된 스타일과 재미나면서도 인생을 생각하게 만드는 서사” 때문에 한국 드라마를 좋아한다고 자주 말한다. 최근에는 다른 대륙 시청자들도 한국 드라마의 서사적 우수성과 배우의 뛰어난 연기력을 한국 드라마 인기 요인으로 거론하는 경우가 많다.
이와 함께, 한국 드라마의 해외 인기를 가능케 한 타국 콘텐츠/미디어의 ‘징검다리’ 효과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수용자는 대만 드라마 <유성화원>을 좋아함으로써 생기게 된 동북아시아 외모에 대한 선호 덕에 한국 드라마 팬이 되었다는 답변을 한다. 원래 일본문화 팬이었던 프랑스와 독일의 수용자는 일본 만화가 한국 드라마로 어떻게 극화되는지 확인하다가 한류 팬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한국 드라마의 존재를 알지 못하던 미얀마 수용자는 자국에 파급(Spillover)되어 들어오는 태국 방송을 통해 한국 드라마 팬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처럼, 미디어 수용과 취향 형성에는 각 수용자가 속한 지역의 개별성과 맥락적 임의성이 작용한다.
셋째로, 한국 드라마에는 여성 중심 서사의 힘과 매력이 있다. 한류 팬덤을 구성하는 인구가 처음부터 현재까지 주로 여성이라는 점은 이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3. 한국 드라마의 여성 중심 서사
1972년 《KBS》에서 방영된 <여로>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기구한 운명을 지닌 한 여성이 온갖 풍파 속에서 자신과 가족의 운명을 헤치고 나아가는 스토리로, 환산 시청률 70%대를 기록했다. 주연을 맡았던 태현실은 오늘날로 말하면 전지현, 송혜교, 손예진 만큼 인기를 누렸다. 텔레비전 수상기 판매량을 급격히 늘린 <여로>는 초기 한국 텔레비전 방송의 발달에 크게 이바지했다. 하지만, 보수언론과 기성세대는 남성 주인공의 바보 연기를 손가락질하며 <여로>를 저급하다고 비난했다. 1989년에는 <사랑의 굴레>라는 드라마가 방영되었다. 여배우 고두심의 “잘났어! 정말”이라는 멘트가 국민적 유행어가 될 정도로 그 인기는 대단했지만, 드라마는 저질 시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한국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보수적 문화 권력은 오랫동안 멜로드라마를 ‘감상적이다’, ‘불륜을 미화한다’, ‘진부하다’ 등의 말로 비판했다. 이들에게 대중문화, 특히 TV 드라마는 천박한 통속성의 세계에 속할 뿐이다.
드라마를 폄훼하는 사람은 주로 중년 남성이다. 반면에, 드라마의 주요 고객은 여성이다. 드라마는 여성의 관점에서 발화하고, 여성의 고통과 애환을 묘사한다. 일본과 중국에서 남성들이 한국 드라마의 인기를 경계하고 텍스트 가치를 폄훼했을 때, 민족주의적 감정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유연한 여성들은 한국 드라마에 자리하고 있는 여성주의 서사를 발견하고 이에 공감했다. 사회적 약자인 여성들은 한국 드라마 시청을 통해, 가부장제의 억압을 상상적으로 해소하고, 강자에 대응하는 기호학적 공간을 만들었다. 즉, 한국 드라마는 ‘여성 장르’다. 이분법적 분류는 그 단순성에도 불구하고 고찰하는 대상을 명징하게 파악하는 데 이바지한다. 문화연구자 피스크(Fiske, 1987)에 따르면,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남성 장르와 여성 장르로 구분된다. 남성 장르가 ‘딱딱한(Hard)’ 현실에 관한 텍스트라면, 여성 장르는 ‘부드러운(Soft)’ 허구를 다룬다. 뉴스와 다큐멘터리, 스포츠 경기가 남성 장르에 속하고, 멜로드라마와 시트콤은 여성 장르라 할 수 있다. 각 장르는 특정 성(Gender)이 선호하는 상징과 기호로 텍스트를 구성함으로써, 장르적 특성을 강화하고 어느 한쪽의 ‘성’에게 더욱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드라마 팬덤의 적극성에 더해, 여성 작가의 증가는 드라마가 재현하는 여성의 모습을 바꾸고 있다. 21세기 한국 드라마의 다음 두 가지 특징은 한국뿐 아니라, 해외 여성 시청자를 매혹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
첫째로, 한국 드라마는 여성의 로맨틱한 판타지를 ‘슬기롭게’ 충족시킨다. 2000년대 드라마 <파리의 연인>과 <궁>을 보자. 남성은 재벌 2세(박신양 분)거나 왕자(주지훈 분)다. 하지만 이들은 성격과 소통 능력에 결함이 있다. 반면 이들의 상대역은 ‘나’같이 평범한 여성이다. 똑 부러지게 완벽하지는 않으나 발랄한 성격에, 꿈을 쫓는 순수한 사람이다. 겉으론 강해 보일지 모르지만 속은 여리다. <꽃보다 남자>는 어떠한가. 평범한 집안의 여성이 부잣집 ‘도련님’들로부터 열렬한 구애를 받는다. 2022년 3월 현재 방영 중인 <사내 맞선>에서도 이런 패턴은 지속된다. 주인공인 신하리(김세정 분)는 평범한 여성이지만 인간적 매력이 있는 사랑스러운 존재다. 신하리는 재산과 권세를 갖췄으나 사회성이 부족한 강태무(안효섭 분)의 결점을 채워줌으로써, 둘 간의 ‘관계적 균형’을 만들어낸다.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모든 나라의 여성 시청자가 주인공과 동일시하고, 드라마 서사에 몰입해 대리 만족을 얻기 쉬운 구조다.
둘째로, 한국 드라마는 정신적으로건 육체적으로건 강인한 여성이 서사를 이끌어간다. <대장금>은 역경과 위기를 이겨내는 여주인공의 지혜와 직업정신을 주제로 한다. <내 이름은 김삼순>의 주인공은 연애에 관한 관심보다 직업의식이 투철한 전문직 여성이다. <황진이>에 나오는 기생들은 재능을 연마해 더 나은 경지에 오르고자 고군분투하는 예술인으로 그려진다. 20세기 한국 드라마가 고연령대 시청자의 가족주의 판타지에 복무했다면, 21세기에는 사회·경제적으로 독립한 여성이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서사가 많다. <멜로가 체질>, <술꾼도시여자들>, <서른, 아홉>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아버지 혹은 남자의 능력에 의존하는 대신 ‘여자 셋’ 친구가 해결한다. 한국 드라마 사상 최초로 여성 강력반장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2007년 《MBC》 드라마 <히트> 이후 여성 액션물은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 <경이로운 소문>, <시지프스: The Myth>, <스위트홈>에서 여주인공을 맡은 김세정, 박신혜, 이시영은 남성 캐릭터보다 더 격렬한 액션을 연기한다. 또한 흥미롭게도 한국 드라마에는 남성의 눈물 연기가 많다. <카인과 아벨>의 신현준, <질투의 화신>의 조정석, <사이코지만 괜찮아>의 김수현, 그리고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이준호의 오열 장면은 수많은 여성 팬들의 공감과 지지를 얻었다. 이제 해외 팬들은 한국 드라마의 클리셰로 남성 캐릭터의 눈물 연기를 꼽을 정도다. 한국 드라마는 여성과의 긴밀한 소통을 통해 서사와 스타일의 진화를 이루고, 국내 시청자뿐 아니라 해외 시청자마저 매료시키고 있다.
4. 넷플릭스와 한국 드라마
최근 글로벌 OTT를 발판으로 해 한국 드라마의 전 세계적인 인기가 더욱 높아지고 있다. 2021년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로 방영됐던 <오징어 게임>은 공개된 지 단 17일 만에 전 세계 1억 1,100만 유료 가입 가구가 시청함으로써 넷플릭스 역대 최다 시청 가구 수 기록을 세웠다. <오징어 게임>에 등장한 한국의 놀이문화는 지구 곳곳에서 유행이 되었고, 지난해 가을 전 세계 각지의 할로윈 축제는 <오징어 게임> 복장을 한 사람들로 가득찼다. 2020년 3월 13일에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좀비 드라마 <킹덤> 시즌 2는 마침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19 팬데믹과 묘하게 겹치며, 여러 나라에서 넷플릭스 시청률 1위를 차지했다. 그 외에도 <사랑의 불시착>, <나의 아저씨>, <지금 우리 학교는> 등이 여러 나라에서 시청률 1위를 기록했다.
2015년, 아시아 시장 진출을 결정한 넷플릭스의 첫 번째 움직임은 지역의 콘텐츠 강국인 한국에 투자하는 것이었다. 발전 가능성이 큰 아시아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한국 드라마를 활용하겠다는 전략이다. 넷플릭스처럼 디즈니+도 동남아 시장 개척을 위해 한국 콘텐츠에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2016년 이래 한국 미디어 산업에 1조 3,200여억 원을 투자해온 넷플릭스는 2022년 현재 한국 콘텐츠 130여 편을 30여 개 언어의 자막과 20여 개 언어의 더빙을 통해 전 세계에 제공하고 있다. 넷플릭스의 프로그램 추천 기능에 따라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미스터 션샤인>, <이태원 클라쓰> 등을 시청한 해외 수용자는 내친김에 ‘몰아보기’(Binge Watching)로 더 많은 한국 드라마를 찾아본다. 콘텐츠 라이브러리 성격을 지닌 OTT는 한국 드라마의 2차 시장으로 기능한다. 새로이 유입된 남성 팬들이 이구동성으로 평하는 것은 한국 드라마의 오락적 질과 작품성이다. 소설 <연금술사>로 유명한 브라질의 작가 파울로 코엘료는 2018년에 제작된 16부작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2020년 10월에 넷플릭스를 통해 보고 난 후 자신의 트위터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나의 아저씨>는 “인간의 조건을 완벽하게 묘사한 작품”이며, “탁월한 각본, 환상적인 연출, 최고의 연기”에 대해 찬사를 보낸다(오원석, 2020).
그런데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인 <오징어 게임>이 영화, 드라마, 케이팝을 망라해 지난 20여 년 모든 한류 타이틀 중 가장 성공한 콘텐츠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전통적으로 미국 미디어 산업은 해외 미디어 산업과의 파트너십을 통해 영향력의 네트워크를 확대해 왔다. 넷플릭스는 CJ ENM, 《JTBC》, 《tvN》, 스튜디오드래곤 등 한국 미디어 기업뿐 아니라 다국적 콘텐츠 기업들과 제휴 관계가 있다. 한국 드라마로서 <오징어 게임>의 전 지구적 인기는 미국문화 헤게모니의 탈중심화도 의미하지만, 미국의 문화·정보 지배구조의 강화를 상징한다. 즉, 한류와 넷플릭스의 결합은 글로벌 대중문화의 현실을 명징히 드러낸다. 전 지구화 시대 대중문화는 다양한 모습을 갖추지만, 그것은 미국이 규정한 표준화를 통한 것이며 자본의 문화지배는 더욱 강력해진다. 한국 드라마가 전 지구화할수록 글로벌 미디어 시스템의 지속성과 편재성을 살펴볼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제 이 글로벌 시스템에 중국 자본이 진입하고 있다. 인터넷과 미디어의 모든 영역에서 사업을 하는 텐센트(??, Tencent)는 할리우드 영화 제작 스튜디오뿐 아니라, 유니버셜 뮤직·소니 뮤직·워너 뮤직 등 세계 최대 음반 유통사에도 관여한다. 글로벌 OTT가 중요해지자, 텐센트는 동남아시아의 넷플릭스로 불렸던 아이플릭스(iflix)를 인수해 사업을 확장하고 있으며, 세계 최대 중국어 검색엔진이자 포털사이트인 바이두(百度)는 동영상 플랫폼 아이치이(iQIYI)를 운영한다. 두 플랫폼 모두, 한국 드라마 콘텐츠가 많다는 점을 강점으로 내세운다. 한국 드라마 산업이 글로벌 OTT의 ‘하청공장’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치밀한 대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5. 드라마와 삶
드라마는 ‘문화 토론장’이다(Newcomb & Hirsch, 1983). 드라마를 통해 우리는 삶과 사회의 수많은 기표를 어떻게 해석할지 깨우친다. 드라마는 대중적 코드로 일상의 소소한 사건을 묘사하고 상징화한다.
“나 술 끊어야겠다.”
“그 좋은 걸 왜?”
“술이 눈물로 나오잖아, 짜증나게.”
드라마 <서른, 아홉>(6회)에 등장한 대사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성 캐릭터들 간의 가슴 절절한 대화를 통해 시청자는 삶의 의미를 되새기고 살아나갈 힘을 충전한다. 한국 드라마는 한국인의 삶 속에서 만들어진 텍스트다. 여성의 삶과 함께 했으며, 또 여성과 함께 나아간다.
전 지구화 시대 한류를 통해 수용자들이 국경을 넘어 상징적으로 연결된다. 한국 드라마를 보며 이들은 삶의 여러 과정에서 한국인들도 자신과 유사한 경험을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란다. 이를 통해 한국 사회와 문화에 친근감과 호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한국문화만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 드라마는 해외 수용자가 선택하는 수많은 문화 메뉴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드라마를 통해 전 세계 많은 시청자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더 나은 삶을 꿈꾼다면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한류를 매개로 세계 시민들이 미디어의 영향력을 깨우치고, 초국적 문화유통 현상에 관해 더욱 맥락적인 분석과 중층적인 사유로 나아가길 고대한다.
참고문헌
우경임 (2016. 5. 5.), “하메네이, 朴대통령에 “나도 ‘주몽’ 자주 봤다””, 《동아일보》,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160505/77944112/1
이현주 (2021. 7. 3.), “[인터뷰]소설가 김진명 ‘고구려 드라마화 기대…조인성 어때요?’”, 《뉴시스》, https://www.newsis.com/view/?id=NISX20210702_0001498626
Fiske, J. (1987). Television Culture. London: Methuen.
Straubhaar, J. (1997). Distinguishing the global, regional and national levels of world television. In A. Sreberny-Mohammadi, D. Winseck, J. McKenna & O. Boyd-Barnett (Eds.), Media in global context: A reader. New York: Edward Arnold.
글ㅣ심두보 성신여자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출처 : 한류NOW 2022년 3+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