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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팝 세계화의 새로운 국면
한 때 서구 대중음악의 아류나 모방품에 불과했던 케이팝은 21세기를 맞아 글로벌 팝 음악으로서의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있다. 케이팝은 정교한 시스템과 전략을 통해 영미 팝이 미처 도달하지 못했던 아이돌 음악의 혁신을 이룩했으며, 이를 통해 뉴미디어 시대의 새로운 미학의 기준과 현대성의 대표성을 획득해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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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 이미지 출처: 셔터스톡/ Boontoom Sae-Kor
1. ‘상륙’의 시대를 지나 ‘세계화’의 시대로
그다지 오래지 않은 과거에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를 가리켜 ‘영미권 대중음악의 상륙사’로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미국과 영국 등에서 유래한 대중음악이, 혹은 미리 그들의 영향을 받아들인 일본의 대중음악이 일정한 시차를 두고 한국에 전래되어 우리 나름의 방식으로 토착화되거나 현지화되는 과정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종교나 의복, 혹은 음식이나 관습이 전해지듯, 한국 대중음악은 대중음악의 선진국들로부터 기술을 직접 전수받거나 종종 그들의 것들을 머리와 눈으로 베끼는 방식으로 현대성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케이팝의 세계정복을 논하는 지금도 몇 가지 측면에서 이 방향성은 일부 유효한 듯 보인다. 한국의 대중음악은 여전히 기술적으로나 미학적으로 영미권 대중음악과 뗄 수 없는 영향 관계를 가지고 있다. 물론 그 격차는 수십 년 전에 비해 현저히 좁혀졌지만 ‘원천’으로서 미국 및 서구 대중음악의 우위는 여전하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급격하게 부상한 케이팝 현상은 미국을 비롯한 서구권이 행사해왔던 문화적/산업적 절대 권력이 약화되었거나 그 위계의 성격이 적어도 바뀔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케이팝의 세계화 혹은 현지화라는 키워드가 자리하고 있다. ‘상륙사’ 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처럼 한국은 오랜 세월 단순히 서구의 영향을 ‘받아들이는’ 포지션에 머물렀다. 케이팝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는 90년대 이전은 물론이고 불과 십 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 대중음악에게 있어서 세계화는 매우 지엽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미국이 주도하는 문화제국주의나 전후 후기식민지주의적인 뉘앙스가 담겨 있었던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무대에서 활약한 김시스터즈나 코리안키튼즈 후에 <손에 손잡고>로 더 잘 알려지게 될 코리아나(아리랑 싱어즈)의 활동도 이와 유사한 맥락에 놓여있다. 일본으로 건너가 활약했던 조용필도, 국제가요제에서 우승을 차지했던 윤복희도 한국에서 비롯된 어떤 유행이나 ‘풍’을 세계로 전파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케이팝이 단순히 바다를 건너 해외 시장에 진출한 것이 아니라 이 시대의 새로운 ‘유행’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2. 현대성의 획득을 넘어 미학의 기준이 되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과거 서구의 전유물로 알려졌던 대중음악의 현대성을 한국이 높은 수준으로 성취했을 뿐 아니라 그 대표성 마저 획득해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영역은 한국에서는 ‘아이돌’로도 불리는 틴 팝(Teen Pop), 그 중에서도 보이밴드/걸그룹 포맷의 음악 장르다. 미국 주류 대중음악에서 가장 오래된 퍼포먼스의 형태 중 하나이자 1960년대 모타운(Motown) 레이블 시절 이후 젊은 미국을 상징하기도 했던 이 장르는 오랜 세월 미국과 영국의 절대적인 독점체제하에 놓여있었다. 그런데 별안간 케이팝이 틴 팝의 본산인 미국이나 가장 강력한 경쟁자인 영국을 제치고 사실상 새로운 글로벌 아이돌 스타의 절대적 공급처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한국보다 10여 년 이상 일찍 아이돌 산업을 구축했던 일본조차 쉽게 넘보지 못했던 위상이다. 그런데 이 같은 변화는 왜 중요한가?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서구 음악권이나 일본의 팝 스타들에 대한 추종에는 늘 그 나라와 문화에 대한 선망이나 동경의 마음이 담겨 있다. 그래서 각 시대의 ‘아이돌’은 청년문화의 핵심을 지배하는 미학의 주도권이 어느 곳에 있는지를 말해주는 지표와도 같은 것이다. 물론 이는 특정한 장르에 국한되지 않는다.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와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라는 두 명의 미국 출신 팝 아이돌에 이어 그 이전까지 세계 대중음악 판도에서 그 어떤 존재감도 없었던 영국의 비틀스(The Beatles)가 새로운 우상으로 떠올랐고, 이는 ‘브리티시 인베이전(British Invasion)’의 서막이 되어 대중음악 신 자체를 미국과 영국이 양분하는 흐름으로 재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60년대 이후 꽃을 피운 미국의 보이밴드/걸그룹 문화 역시 영국으로 건너가 스파이스 걸스(Spice Girls)의 전 세계적 열풍을 불러일으키기도 했고, 이는 다시 한국으로 전해져 케이팝의 모델이 되었다. 하지만 이 주도권은 어디까지나 영어를 사용하는 서구권, 그 중에서도 사실상 하나의 음악산업이라고 간주할 수 있는 미국과 영국이라는 특정한 문화권에 국한되어 있었다. 케이팝의 등장 이전까지 서구 대중음악 역사에서 그 어떤 외부의 흐름이 ‘아이돌’이라는 개념에 있어서 미학이나 유행의 기준이 되었던 적은 없었다.
방탄소년단(BTS)과 블랙핑크로 대표되는 케이팝은 전 세계 틴 팝 아이돌의 대표 이미지를 이제 완전히 바꿔놓고 있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조나스 브라더스(Jonas Brothers), 원 디렉션(One Direction), 저스틴 비버(Justin Bieber) 등 젊은 북미 아티스트들이 독점적으로 차지했던 ‘아이돌’의 자리를 한국의 케이팝 아티스트들이 급격한 속도로 대체하기 시작한 것이다. 디즈니나 픽사의 애니메이션에 케이팝 스타들을 빼닮은 캐릭터들이 등장하고, 할리우드 영화계가 케이팝이나 케이팝 아이돌들을 소재로 삼은 영화를 앞다투어 제작하기로 한 것도 이 같은 변화를 반영한 움직임이다. 젊고, 힙하고, 현대적인 젊은이의 이미지를 이제 한국이 차지하기 시작한 것으로, 이것은 빌보드 차트 순위나 음반 판매량 이상의 더 중요하고 실질적인 변화다. 케이팝이 단순히 돈이 되는 산업이 아니라 새로운 미학의 중심이 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확인이 된다. 원 디렉션 이후 미국과 영국에서 데뷔한 보이밴드들은 더 이상 방탄소년단을 필두로 한 케이팝 그룹들만큼의 시장 지배력이나 팬덤의 응집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소셜 미디어 지수나 구글 트렌드와 같은 빅데이터에서도 영미권의 보이그룹은 더 이상 케이팝의 직접적인 경쟁상대가 되지 못한다. 세계 대중음악 시장의 1위와 4위를 나눠가지고 있는 나라들이 케이팝만큼의 자본이나 노하우를 가지고 있지 못할 리는 없을 것이다. 인종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그리고 역사나 저변에 있어서도 그들의 우위는 여전히 굳건하다. 하지만 케이팝은 그들이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틈새 시장을 장악해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서 이를 새로운 주류 산업으로 끌어올리는 방식으로 기존 질서의 전복을 꾀하기 시작했다.
3. 혁신과 발상의 전환을 통한 세계화와 현지화
케이팝의 세계화라는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발상의 전환은 기존 서구 대중음악에서 막다른 곳에 이르렀다고 판단했던, 또한 높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늘 음악적으로 평가절하 당해왔던 보이밴드/걸그룹 음악의 관습성을 한국만의 방식으로 극복한 것이다. 영미권의 대중음악에서 보이밴드나 걸그룹과 같은 소위 ‘아이돌’ 음악은 ‘버블검 팝(Bubblegum Pop)’이라고 하는 매우 특정한 스타일의 음악만을 수행한다. ‘버블검 팝’은 1960년대 모타운 레코드를 비롯한 R&B 성향의 팝 음악에서 유래한 팝 음악의 하위 장르로, 달콤하고 경쾌한, 무엇보다 무난하고 평이한 메시지와 태도를 앞세운다. 수려한 외모의 멤버들을 통해 저연령층, 그 중에서도 십대 여성층을 직접적으로 공략하는 이 같은 접근은 상업적으로 높은 확률의 성공을 보장하기는 하나 음악적으로는 진지하거나 높은 수준의 것으로 평가받지 못하는 한계를 갖고 있다. 물론 음악적으로 높은 수준을 요구하지 않기에 아티스트에게 요구되는 재능의 크기 역시 다른 음악 장르에 비해 작은 편이다. 대부분의 보이밴드/걸그룹은 리더를 중심으로 특정한 멤버에게 절대적인 역할이 집중되어 있고, 나머지 멤버들은 백업 혹은 보조의 역할만을 수행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장기적으로 그룹의 생명력에도 영향을 미친다. 과감한 음악적 변신이 불가능하거나 그러한 변신을 원하지 않는 팀들은 대개 짧은 전성기를 지나 해체의 수순을 밟는 것이 보통이고, 혹은 멤버들 간의 음악적 견해 차이나 주력 멤버들의 독립으로 그룹의 커리어가 마무리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케이팝은 많은 부분 이 같은 서구식 보이밴드/걸그룹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확보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특히 버블검 팝과 같은 아이돌에 특화된 장르에 머물지 않고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음악적 세계로 빠르게 진화했다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는데, 실험적인 힙합이나 일렉트로닉 사운드처럼 보이밴드/걸그룹들이 기피하거나 소화하기 어려웠던 음악 스타일을 적극적으로 껴안아 다양화를 꾀한 것이 주요했다. 이를 통해 케이팝은 영미권 대중음악에서는 장르 뮤지션들에게서나 기대할 수 있었던 첨단의 사운드를 구현할 수 있었고, 오히려 대중음악 신 전체의 관점에서 보자면 선구적인 장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방탄소년단이나 NCT 등 케이팝을 대표하는 보이밴드들의 음악은 서구의 보이밴드들과 비교해 실험적인 면모가 유독 돋보이는데, 보편적인 팝 음악에서는 종종 기피되는 개념적 구성이나 철학적인 가사를 음악에 도입한다든지, 아방가르드라고 할만한 난해한 사운드와 구성을 음악에 도입한다는지 하는 것이 차별점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버블검 팝을 비롯한 팝 음악의 미덕이라고 여겨지는 ‘쉬움’의 영역을 넘어선다는 것이다. 케이팝 아이돌의 음악은 종종 쉽게 이해하거나 친해지기 어려우며, 그 안에 담긴 다양한 서사나 상징 혹은 ‘세계관’들을 이해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요구되곤 한다. 하지만 이 과감함은 ‘팬덤’으로 불리는 고관여층의 소비자를 만들어낼 수 있고, 그렇게 확보된 팬덤을 바탕으로 더욱 공격적이고 실험적인 시도를 이어나갈 수 있게 된다. 발상의 전환이다.
퍼포먼스에 있어서 케이팝은 서구의 아이돌 음악이 단 한 번도 도달하지 못한 기술적으로 높은 수준의 무대를 구현해 이를 세계화의 가장 주요한 변별점으로 삼고 있다. 세계 시장에서 케이팝을 하나의 독립된 ‘장르’로 간주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R&B 장르에 기반을 둔 보컬 그룹 혹은 록 그룹의 형태를 띤 서구의 틴 팝 그룹 혹은 보이밴드/걸그룹 들과 달리, 케이팝 아이돌은 기본적으로 댄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퍼포먼스형 그룹에 가깝다. 미국과 영국에서 댄스 그룹의 정체성을 가진 아티스트들의 역사는 길지만, 대부분의 경우 안무는 그룹과 솔로 아티스트를 막론하고 보조적인 역할만을 담당한다. 그에 반해 케이팝 아이돌은 무대 위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며 완벽하게 짜여진 동작의 시퀀스와 동선을 따라 거대한 한편의 퍼포먼스를 구성한다. 당연히 이 같은 무대에 요구되는 춤의 수준은 비교할 수 없이 높은 것 일 수밖에 없다. 아이돌의 트레이닝 과정에서 춤은 그 어느 분야보다도 많은 시간과 노하우가 투자되는 분야로, 음악을 흥미롭게 전달하는 부가적 도구로가 아니라 무대 퍼포먼스 그 자체를 고유한 아이덴티티로 삼을 수 있는 정도로 정교하게 마련된다. 비보이나 댄스 크루의 정체성을 음악에 결합시킨 케이팝 아이돌의 무대는 글로벌 주류 대중음악 산업 내에서 마땅한 경쟁자를 삼기 어려우며, 이는 음악 장르를 떠나 케이팝을 기존의 팝 음악과 엄밀히 구분되는 장르로 인식하게 만드는 이유기도 하다.
4. ‘공식’이나 ‘견본’으로서 케이팝의 세계화
정교한 퍼포먼스를 앞세운 케이팝은 이미 그 특유의 변별력으로 세계 시장을 빠른 속도로 잠식하고 있다. 과거 보이밴드/걸그룹의 모델이 서구적인 것을 의미했다면, 현재는 그 자리를 케이팝이 대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 여러 가지 변화의 조짐이 읽히고 있다. 수십 년간 쌓아온 현지화의 노하우를 통해 케이팝 아이돌 음악이 북미, 유럽, 동아시아, 심지어 남미 시장을 성공적으로 공략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미 보편화된 소셜 미디어에 더해 위버스와 같은 새로운 팬 커뮤니티 플랫폼의 발달에 힘입어 케이팝의 세계화에는 더 이상 시차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 같은 시차의 부재는 동시다발적이며 예측할 수 없는 케이팝의 동시대적 인기를 만들어낸다. 레거시 미디어의 도움을 받지 않은, 심지어 대형기획사 출신이 아닌 방탄소년단의 역사적인 세계정복, 국내 대중들에게는 오히려 인지도가 낮은 케이팝 아이돌의 해외 진출과 성공, 해외에서 먼저 데뷔하는 아이돌 그룹의 등장, NiziU나 WayV처럼 아예 한국 무대를 거치지 않고 현지에서만 활동하는 글로벌 그룹의 등장까지, 케이팝은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화의 미션을 달성하기 시작했다.
더 흥미로운 변화도 시작되고 있다. 케이팝 그 자체가 일종의 산업적 공식이나 견본이 되어 모방의 대상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 아시아권에서는 케이팝 아이돌의 특징을 모방한 그룹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케이팝의 제작 방식을 그대로 도입해 만들어진 SB19이나 BINI와 같은 필리핀 아이돌 그룹이 대표적인데, SB19은 폭발적인 팬덤의 화력을 바탕으로 소셜미디어 공간을 점령하는데 이어 이제 전 세계 시장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뿐인가? 케이팝 아이돌의 성공은 심지어 팝의 본고장이자 틴 팝의 종주국인 미국 시장의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다. 이미 미국의 여러 메이저 음반사들이 한국 회사들의 힘을 빌려 미국판 케이팝 그룹을 만들겠다고 선언한 상태다. 아마도 이들의 목표는 미국 팝의 하위 장르로 존재하는 보이밴드/걸그룹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한국으로 건너가 토착화된 케이팝의 진화된 모델을 미국 팝으로 다시 흡수해 그들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 서구의 대중음악이 한국에 본격적으로 ‘상륙’한지 70여 년 만에 그야말로 케이팝의 현대성이 세계 팝의 기준이자 새로운 모델이 될 날이 멀지 않았다.
글ㅣ김영대 에스노뮤지콜로지 박사, 대중음악평론가
(출처 : 한류NOW 2022년 3+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