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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의 시작, 미국 스튜디오 시스템의 과거와 현재

  • [등록일]2020-07-24
  • [조회] 24884

스튜디오의 시작,
미국 스튜디오 시스템의 과거와 현재




미국 스튜디오 시스템을 대표하는 단어는 할리우드(Hollywood)다. 할리우드는 단순히 LA 지역에서 영화를 제작하는 엔터테인먼트 대기업들을 지칭하지는 않는다. 할리우드는 미국 문화를 상징하며, 미국 그 자체다. 1990년대 이후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는 단순히 영화산업에서 수익을 내는 것이 아니라, 메이저 스튜디오와 독립 제작사, 국제적 배급사, 공중파 TV, 케이블 TV, 신문, 잡지, 출판, 테마파크, 프로 스포츠 구단까지 통합하는 종합 엔터테인먼트 그룹 혹은 미디어 그룹으로 새롭게 플랫폼을 바꿨다. 현재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라고 하면 워너브라더스, 유니버설, 월트디즈니, 콜롬비아, 파라마운트, 20세기 폭스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 메이저 스튜디오는 할리우드 고전 시기 메이저 스튜디오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고전 시기 스튜디오가 영화관 박스오피스에서 대부분의 수익을 거뒀다면, 현재의 스튜디오에서 미국 박스오피스 수입은 일부분일 뿐이다. 더 큰 수익이 해외 배급이나 상영, 그리고 방송 플랫폼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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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 이미지 출처: www.discoverlosangeles.com


1. 할리우드의 탄생


미국 스튜디오 시스템을 대표하는 단어는 할리우드다. 할리우드는 단순히 미국 LA 지역에서 영화를 제작하는 엔터테인먼트 대기업들을 지칭하지는 않는다. 할리우드는 미국 문화를 상징하며, 유럽이라는 구세계와 대비되는 신세계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미국 그 자체다. 그럼 할리우드는 언제, 어디에서 유래되었는지 살펴보는 것이 할리우드 그 자신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영화는 1895년 프랑스 화학자인 뤼미에르 형제에 의해 발명됐다. 그들은 영화 필름을 만들었고 카메라와 영사기를 만들어 1895년 파리의 살롱에서 관객들에게 표를 팔고 그들의 영화 <기차의 도착>을 유료로 보여줬다. 수십 명의 관객들은 함께 스크린이라 불리는 흰 천에 투영된 약 1분짜리 동영상을 보았고, 이런 관람을 ‘시네마(cinema)’라 불렀다. 시네마는 영화관이란 말이지만 영화라는 말이기도 하다. 영화의 출발은 관객과 함께였고, 영화는 대중문화이자 대중예술로서 스스로 정체성을 갖게 됐다.


미국에서도 뤼미에르 형제와 비슷한 시기에 영화를 발명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바로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Thomas Edison)이다. 에디슨은 자신의 최고 히트작 ‘전구’와 ‘축음기’ 이후 3번째 획기적인 발명품을 만들었는데 바로 ‘키네마토그래프(cinematographe)’라 불리는 영화 카메라였다. 에디슨의 발명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세계 최초의 영화로 인정받지 못했던 이유는 스크린으로 대중이 모여 함께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방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니클로디온(Nickelodeon)’이라는 당시 5센트 동전을 넣고 혼자 영화를 보는, 지금으로 보자면 개인 미디어에 가까운 영화 시스템을 발명했다. 1905년 ‘니클로디온’은 미국에서 대유행이었지만 그 인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마치 전자오락실처럼 생긴 이 ‘니클로디온’ 극장에서는 관객들이 긴 줄을 서서 동전을 넣고 1분짜리 <호수로 장난치는 아이>나 <소방수의 출동>을 보았는데, 이 개인 미디어는 세상에 너무 일찍 나왔다. 오늘날 스마트폰이나 노트북, 스마트패드로 영화를 보는 것과 같은 개념이었다. 에디슨은 영화산업에서 독과점의 힘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장사꾼이었다. 에디슨은 무자비한 장사꾼이었는데, 그의 경쟁 영화제작자가 에디슨의 카메라를 사용하지 않고 몰래 프랑스제나 독일제 카메라를 유럽에서 들여와 영화를 촬영하는 것이나 에디슨의 영사기가 아닌 다른 제작사의 영사기를 사용하는 것을 법적으로 그리고 불법적으로 방해했다. 법적으로는 특허법 위반으로 고소했고, 불법적으로는 폭력배를 동원해 촬영장을 뒤집어엎거나 영화관을 때려 부수기도 했다.


당시 영화산업은 지금과 비교하면 규모가 작은 산업이었고 많은 이민 노동자들을 관객으로 했기 때문에, 동유럽에서 막 이민을 온 유태인들이 이 신생 영화산업에 뛰어들었다. 동유럽 이민 유태인들은 에디슨의 카메라와 영사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이들은 유럽에서 왔고, 유럽의 영화 카메라와 필름, 영사기를 에디슨 몰래 수입해 사용했다. 그리고 에디슨이 합법과 불법을 모두 동원해 새로운 시장 진입자들에게 특허권이라는 높은 진입장벽을 쌓자, 에디슨의 영화 스튜디오가 있던 동부의 뉴욕을 떠나 서부의 맨 끝 캘리포니아로 이주했다.


이들은 당시 최신 기술의 카메라였던 프랑스와 독일 카메라를 사용해 미국 LA에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자주 비가 내려 영화 촬영이 중단되곤 했던 뉴욕과는 달리 캘리포니아의 사막은 하루 종일, 일 년 내내 영화를 촬영하기에 좋았다. 또, 뉴욕에서 기차로 일주일이나 걸리는 거리였기 때문에, 에디슨이 보낸 폭력배들이 영화 촬영장으로 쳐들어오면 미리 전보를 받고 멕시코 국경을 넘어 숨어 버렸다. 이들이 만든 영화는 에디슨의 단편 영화보다 더 긴 장편 영화였고, 당시 유행하던 대중소설인 펄프 픽션에서 이야기를 가져왔다. 1900년대 초, 미국 대중소설의 주요 장르는 멜로 드라마, 서부 이야기, 범죄 수사물, 모험 활극, 코미디였고, 이런 이야기들은 영화 시나리오가 되어 상업영화로 제작됐다. 1910년대가 되자 동유럽 유태인 출신 제작자들은 LA에 ‘할리우드’를 세웠고 그들이 벌어들인 막대한 돈으로 자신들의 세계를 만들었다. 그즈음 에디슨도 영화산업을 포기했고, 미국에서는 그들을 막을 자가 아무도 없게 되었다. 에디슨의 독과점을 피해 서부로 이주했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영화제국을 만들고 이를 독과점으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2. 스튜디오 시스템과 미국 고전영화 시기


할리우드에 스튜디오를 처음 만들었던 제작자는 아돌프 주커(Adolph Zukor)였는데, 그는 1912년 영화 제작사 페이머스 플레이어스(Famous Players)를 세웠다. 그리고 1916년 영화 배급사였던 파라마운트 픽처스(Paramount Pictures)를 인수해 영화 제작사와 배급사가 수직으로 통합된 스튜디오 시스템을 처음으로 세웠다. 파라마운트는 자사에서 제작한 영화를 우선적으로 배급했고, 영화를 구매하는 극장에 자사 영화를 끼워팔거나 강매하고 일괄 구매하는 ‘블록 부킹(block booking)’을 시행했다. 그리고 그렇게 축적한 자본으로 1920년대에는 주요 도시 영화관들을 인수해 제작-배급-상영에 이르는 수직 통합 시스템을 만들었다. 영화산업은 다른 소비재와는 달리, 매 작품마다 흥행에 성공할 수는 없다. 보통 시나리오만 보고 배우와 감독을 패키징 해 영화 투자를 하는데, 지난 100년의 할리우드 역사를 평균 내보면 세 편의 영화 중 한 편은 흥행에 성공하지만, 한 편은 본전만 건지고, 다른 한 편은 흥행에 실패한다. 마치 이런 1/3의 확률은 도박과도 같아서 어떤 영화 제작자는 9편을 계속 성공하다 마지막 1편에 크게 실패해 그동안 얻은 수익을 다 잃기도 한다.



1920년대 영화산업에 종사했던 할리우드 거물들은 이런 산업적 리스크를 방지할 시스템을 고안했는데, 그게 바로 ‘수직 계열화’였다. 만약 제작에서 배급, 상영에 이르는 모든 영화산업의 시스템을 수직으로 계열화해 통합하면, 영화산업은 한 편, 한 편의 성공에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어진다. 일 년에 영화관을 찾는 관객의 수가 계속 늘어나는 상황에서 어느 도시의 주요 영화관 체인을 독점하고, 전 미국에 있는 영화관에 영화를 공급하는 배급사를 독점하면, 어떤 영화를 만들어도 언제나 산업 평균 이상의 수익률을 얻을 수 있다. 독과점으로 영화산업을 장악하면, 독과점을 만든 메이저 스튜디오의 영화들은 여름 방학이나 겨울 크리스마스 시즌 같은 가장 관객이 많이 몰리는 시즌에 자사의 영화를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오래 틀 수 있고 언제나 그 영화를 관객에게 강매할 수 있다.


이렇게 미국 영화산업은 ‘할리우드’라 불리는 제작-배급-상영으로 수직 계열화된 독과점 산업으로 고도 성장기를 맞게 된다.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를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 시기, 또는 미국 고전 영화 시기라고 불린다. 이 30년의 기간 동안 미국영화는 세계 최고의 상업영화 제작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다. 1920년대까지는 유럽영화 특히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영화산업이 세계 영화시장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영화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유럽이 세계 1차 대전과 2차 대전을 겪으면서 영화산업이 붕괴되는 수준에 이르자, 미국영화는 그 시기에 전 세계 영화 배급망을 장악하며 최고의 상업영화를 장르 영화로 만들어내게 됐다. 이 고전영화 시기에 할리우드에는 ‘빅파이브(Big Five)’라 불리는 파라마운트, MGM(Metro-Goldwyn-Mayer), 20세기 폭스(20th Century Fox), 워너브라더스(Warner Bros.), RKO(RKO Radio Pictures) 라는 메이저 스튜디오가 있었고, ‘리틀 스리(Little Three)’라 불리는 유니버설 스튜디오(Universal Studios)와 콜롬비아 픽처스(Columbia Pictures), 유나이티드 아티스츠(United Artists)가 생겼다.


1927년 할리우드는 유성 영화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1920년대 전 세계적으로 영화산업이 불황기였고, 할리우드는 이를 유성 영화로 돌파해 냈다. 영화에 사운드가 들어오자, 대사와 나레이션, 영화음악이 생겨났고, 영화는 더 풍부한 이야기와 장르를 만들어냈다. 영화에 뮤지컬이라는 장르가 들어오게 됐고 더 깊이 있는 대화를 녹음하기 시작했으며 복잡한 사건과 인물을 묘사하게 됐다. 영화역사가들은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의 시기를 할리우드 고전영화 시기라고 칭하는데, 이것은 마치 음악에서 바로크 시대가 고전음악 시기를 만들어냈듯이, 이 시기에 영화는 오늘날 영화라 불리는 영화의 형식과 언어를 창조해 냈다는 의미였다. 고전영화 시기에 할리우드 스튜디오는 제작보다 전 세계 영화 배급시장을 장악해 엄청난 배급 이윤을 남겼다. 그리고 미국 전역의 영화관 체인 중 3/4을 소유하면서 상영 부문에서 수익을 극대화했다.


독과점화 된 할리우드 스튜디오는 배급과 상영에서 독점적 권한을 차지했는데, 새롭게 등장한 독립 제작사가 아무리 좋은 영화를 제작해도 배급이나 상영에서 싼 값에 사들여 제작사보다 더 많은 이윤을 남겼다. 이것을 스튜디오의 ‘네거티브 픽업 딜(Negative pickup deal)’이라고 하는데, 스튜디오가 직접 제작하는 ‘인 하우스(in-house) 제작’ 외에도 독립 제작사가 자체 자본을 조달해 영화를 만들면 시사회를 해서 상업적 성공을 거둘 것 같으면, 자신들의 배급사를 통해 자신들이 소유한 영화관에 상영해 주는 것이다. 독립 제작사는 이 시스템에서 제외되면 관객을 만날가능성이 멀어지고, 상업적으로 실패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제작에 따른 리스크는 독립 제작사가 지게 되고, 안정적인 배급과 상영 수익은 메이저 스튜디오가 챙기는 시스템이었다.


3. 파라마운트 반독과점 판결과 뉴 할리우드의 시작


미국 사회가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시기는 1930년대 대공황기였다. 미국 자본주의는 처음으로 큰 시련을 겪었다. 주식시장은 붕괴되고, 창고에 물건은 쌓여 있는데 노동자는 해고돼 그 물건을 사줄 수 있는 소비자가 되지 못했다. 미국의 자본주의 시스템이 멈췄던 암흑기였다. 할리우드는 이 시기에 급성장했다. 영화산업의 경쟁 상대는 관광이나 스포츠, 공연이나 음악 등 엔터테인먼트 산업이었다. 사람들이 돈이 없으니 관광을 하거나 스포츠를 직접 하거나 브로드웨이의 비싼 공연을 관람하기보다는 영화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영화는 가장 저렴한 오락거리였다. 그리고 수직 계열화된 독과점으로 잠재적 신규 시장 진입자를 막았다. 1차 세계대전으로 프랑스와 독일, 영국 영화산업이 어려워지자 유럽에도 진출하고 1930년대에는 중국, 일본, 인도 같은 아시아 지역에도 진출했다. 당시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였던 조선에도 미국 할리우드 영화는 배급망을 깔고 영화를 공급했다.


이런 미국의 대공황을 종식 시킨 건, 루스벨트 정부였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당시 자본주의에서는 사용하지 않던 국가의 자본시장 개입을 주도했다. 정부가 세금으로 도로나 댐, 전기 시설 같은사회간접 시설 공사를 하고, 대기업의 독과점도 철폐해 미국 자본주의에 새로운 피가 돌게 했다. 이때 미국 할리우드 영화산업의 독과점도 루스벨트 정부에 제소를 당했다. 1938년 루스벨트 정부는 메이저 스튜디오가 제작에서 배급, 상영에 이르는 영화산업의 모든 시스템을 장악하는 것은 새로운 기업 참여자들의 기회를 제한하는 불법이라면서, 산업에서 독과점을 금지하는 반트러스트법(Anti-trust law)으로 제소했다. 할리우드는 최대한 판결을 지연시켰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이 새로운 세계 자본주의 질서의 중심에 서자, 1949년 연방대법원은 스튜디오의 독과점을 인정하고 제작과 배급, 상영 셋 중 하나를 포기할 것을 판결했다. 이 사건이 ‘파라마운트 판결’이다. 그 결과 할리우드 스튜디오들은 깊은 고민 끝에 상영을 포기했다.


당시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가 상영 부문을 포기한 것은 앞으로 산업이 영화관의 박스오피스(box office)가 아니라 당시 막 부상하던 TV 산업에서 미래의 수익이 창출될 거란 믿음에서였다. 파라마운트는 1940년에 시카고에 처음으로 TV 방송국을 설립하고, 1943년에는 LA를 비롯한 여러 대도시에 상업 방송국을 설립해 빠른 속도로 방송 산업의 상업화를 주도해 나갔다. 대공황 시기를 거치면서 미국 정부는 산업에서 독과점이 미국 자본주의 시스템을 해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영화관과 TV를 포기한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는 1960년대에 들어서자 위기에 봉착했다. 그동안 배급과 상영의 힘으로 밀어붙이며 독과점을 통해 안정적으로 수익을 냈던 시스템은 그 구조가 밑바닥부터 흔들렸다. 거기다 할리우드 스튜디오를 구성하던 사람들의 나이도 문제가 되었다. 1930년대에 청년들이었던 영화 제작자들은 1960년대가 되자 노인이 됐는데, 더 이상 영화 주 관객층이었던 20대 청년들의 취향과 생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타성에 젖은 영화들만 만들어냈고 대부분이 참사에 가까운 흥행 실패를 거뒀다.


1960년대에 메이저 스튜디오 RKO가 파산했고, MGM은 규모가 축소됐다. 메이저 스튜디오들도 차례로 영화와는 무관한 대기업에 팔려나갔다. 석유회사 걸프 앤 웨스턴이 파라마운트를 사들였고, 음료회사 세븐업이 워너브러더스를 구매했다. 코카콜라도 콜롬비아 스튜디오를 매수했다. 1975년에는 유니버셜 스튜디오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조스(Jaws)>를 블록버스터 방식으로 배급 상영했다. 이후 할리우드는 막대한 제작비를 한 편의 영화에 집중해 투자하고, 최대 규모로 마케팅을 하며 최다 스크린을 통해 상영하는 블록버스터 상영 방식을 들여왔고, 할리우드 영화의 중심축은 드라마에서 스펙타클 액션 무비로 옮겨갔다. 뉴 할리우드의 시작이었다.


유니버설 스튜디오에 의해 블록버스터 방식으로 배급 상영된 영화 <조스> 포스터

(출처: IMDb)



4. 포스트 할리우드와 거대 미디어 기업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에 걸쳐 미국 할리우드 영화산업은 미디어 기업 간 인수 합병을 통해 오늘날 메이저 스튜디오 시스템으로 새롭게 재편됐다. 그 당시 기업 인수 합병은 ‘새로운 수직 통합화’라고 불릴만 하다. 이는 대공황을 겪으면서 기업의 독과점에 대해 엄격한 금지 규정을 만들었던 미국 정부에서 독과점을 새롭게 용인하는 움직임과 맞물려 나타났다. 영화사학자들은 이 시기 할리우드를 ‘포스트 할리우드(Post Hollywood)’라고 지칭하게 되는데, 1990년대 이후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는 단순히 영화산업에서 수익을 내는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메이저 스튜디오와 독립 제작사, 국제적 배급사, 공중파 TV, 케이블 TV, 신문, 잡지, 출판, 테마파크, 프로 스포츠 구단까지 통합하는 종합 엔터테인먼트 그룹 혹은 미디어 그룹으로 새롭게 플랫폼을 바꿨다. 이 새로운 수직 통합화는 고전 시기 스튜디오의 단순한 수직 통합화와는 달리, 보다 느슨한 방식으로 각각 분사시킨 자회사들이 수익 체인으로 네트워크화 된 형태였다. 여기에 인터넷 미디어 그룹까지 결합하면서 영화와 방송, 통신이 함께 결합한 형태의 새로운 다국적 미디어 그룹으로 바뀌었다.


그 첫 움직임은 1985년 호주 언론재벌 루퍼트 머독(Rupert Murdoch)의 뉴스 코퍼레이션(News Corporation)이 20세기 폭스를 인수 합병한 것이고, 1989년 타임 미디어 그룹(Time Inc.)이 워너 스튜디오를 소니(Sony)가 콜롬비아 스튜디오를 사들였다. 그 후 1990년대에 바이어컴(Viacom)이 파라마운트를, 월트디즈니(Walt Disney)가 ABC 방송국을, 시그램(Seagram)이 유니버설을 차례로 매수하면서 미디어 산업 사이에 네트워크화와 수직 통합화가 이뤄졌다. 가장 큰 빅 딜(Big Deal)은 2000년에 있었던 당시 미국에서 가장 큰 인터넷 업체 AOL(America Online)이 가장 큰 미디어 그룹 타임워너(Time Warner) 그룹을 합병해, AOL-타임워너라는 공룡 미디어 그룹으로 탄생한 사건이었다. 이후 AOL이 재매각하긴 했지만 2000년대 가장 큰 패러다임 변화는 IT 그룹에 돈이 몰리면서 IT 그룹이 미디어 그룹을 인수 합병하는 방식이었다.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 시스템이 이런 거대한 미디어 그룹에 편입되는 현상은 여전히 할리우드 영화가 매력적인 콘텐츠였고, 그 콘텐츠의 수익을 최대한 창출할 수 있는 방법이 수직 계열화로 네트워크화된 방송과 통신, 음반 산업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이 현상은 미국 미디어 산업이 다국적화 되고기업의 소유 구조가 네트워크화 되어, 단일 기업의 독과점을 막는 예전 법률로는 더이상 법적 제제를 할 수 없는 상태가 됐고, 막강한 미국 미디어 기업이 전 세계 문화산업에 대해 독점적 지배권을 행사하는 것을 미국 정부 또한 정책적으로 지원했기 때문에도 가능했다.


현재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라고 하면, 워너브라더스, 유니버설, 월트디즈니, 콜롬비아, 파라마운트, 20세기 폭스로 6대 메이저를 꼽을 수 있다. 이들 메이저 스튜디오는 할리우드 고전 시기 메이저 스튜디오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고전 시기 스튜디오가 영화관 박스오피스에서 대부분의 수익을 거뒀다면, 현재의 스튜디오에서 미국 박스오피스 수입은 일부분일 뿐이다. 더 큰 수익이 해외 배급과 상영이나 방송 플랫폼에서 나온다. 어쩌면 현재의 할리우드 스튜디오는 콘텐츠 생산에서 아이디어 뱅크같은 역할을 맡고 있다. 여전히 매력적인 콘텐츠를 제작하고 홍보하지만, 보다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수익을 거두고 거대 미디어 그룹 안에서 하나의 분업화된 역할만 담당할 뿐이다. 고전 시기 할리우드와는 달리 최근의 할리우드는 국제적이다. 스튜디오를 소유한 미디어 그룹의 모기업 자체가 대부분 다국적 외국 기업일뿐더러, 제작비 또한 최근에는 중국과 인도, 아랍, 유럽에서 조달한다. 그들의 잠재적 고객 또한 전 세계인이다. 현대 할리우드 영화가 이제는 미국의 정체성을 반영하기를 중단하고 다국적이며 무국적 문화산업을 지향하는 것도 이러한 기업 지배 구조와 수익 구조에 기인한다



참고자료
송낙원 (2018). 『미국 영화 산업』, 커뮤니케이션북스.
송낙원 (2007). 『포스트 할리우드』, 커뮤니케이션북스.


글ㅣ송낙원 건국대학교 영상영화학과 교수

     (출처 : 한류NOW 2020년 7+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