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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원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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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상 탄생 100주년, 독일이 인정한 세계적 작곡가

  • [등록일] 2017-06-16
  • [조회]197
 

독일에서 윤이상 작곡가의 '탄생 100주년'을 맞는 행사가 줄을 잇고 있다. 그의 굴곡 많았던 삶과 음악적 업적을 되짚어보는 기사도 꾸준히 나온다. 60년대 중앙정보부에 납치되어 고문을 당하고, '동백림 사건'으로 간첩에 몰렸다가 국제적인 압력에 풀려난 작곡가. 많은 사람들이 윤이상을 정치적 파고에 휘말린 작곡가로만 알고 있다. 하지만 독일이 이야기하는 그의 삶을 살펴보면 그는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의, 세계적인 작곡가임을 깨닫는다.

 

지난 4월에 한국에서 열린 통영국제음악제에 맞춰 윤이상에 관련한 기사를 실었던 독일 《타케스슈피겔》은 윤이상을 '아방가르드에 속한 첫번째 비서양인 작곡가'라고 평가하며 '많은 이들이 그에게 경탄했으며, 또 많은 이들로부터 시기를 받았다'고 썼다. 또한 '지금은 쫓겨난 박근혜 대통령 때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예술가 블랙리스트가 돌았다'며 '(통영) 음악제에도 돈을 주지 않았다. 더 씁쓸한 것은 그녀는 당시 윤이상을 납치하고 고문했던 독재자 박정희의 딸이다. 이 운명적인 얽힘, 예술과 권력의 비교도 되지 않는 줄다리기에 윤이상은 강렬한 오페라곡을 만들어냈다'고 설명했다.

 

6월 초 기사에서는 윤이상이 '베를린의 음악씬에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했다. 독일이 보는 윤이상은 어떤 작곡가일까. 지난 6월 7일 윤이상의 삶을 돌아본 기사를 통해서 우리가 잘 몰랐던 세계적 작곡가의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자.

 

 


<윤이상을 다룬 독일 '타게스슈피겔' 기사>

 

 

 

윤이상 100주년, 음악으로 그리다.

 

한국 작곡가 윤이상은 베를린의 음악씬에 영향을 미쳤다. 그의 생일 100주년을 앞두고 그의 제자 토시오 호소카와와 만났다.

 

윤이상의 특징은 여러가지 모순이 합쳐져 있다. 먼 동쪽의 고요함에서 서유럽의 목적 지향적, 부드러움과 완고함, 정치적 참여와 예술에의 완전한 몰두. 올해 윤이상의 100주년을 기념한 수많은 행사를 보면, 이는 곧 한 독일 작곡가를 기념하는 것이다. 그의 한국적 뿌리가 그의 작품의 모토였으며, 동시에 베를린의 음악적 삶에 귀중한 영향을 주었던 독일 작곡가.

 

그는 1917년 9월 17일 한국의 바닷가 도시 통영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 당시에는 일본 제국주의의 점령 하에 있었다. 독립 운동에 참여한 그는 1943년 감옥에 가 고문당했다. 프랑스에서 공부를 마친 이후 그는 1957년 서베를린으로 왔는데, 여기서 그는 조셉 루퍼와 보리스 블라허에게 쇤베르그의 12음 기법(Zwolfton-Methode)에 따른 작곡을 배운다. 그는 1966년 도나우싱엔 현대음악제에서 초연한 오케스트라곡 'Reak(예악)“으로 세계적으로 우뚝선다. 그는 아방가르드에 다다랐다.

 


<윤이상 작품 '예악' 듣기>

 

북한 방문 이후 납치당하다

 

이 작곡가가 1967년 북한을 방문한 이후 남한의 정보국에 잡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을 때 이 '윤일상 사건'은 중요한 정치적 이슈가 됐다. 2년 후 그의 석방을 이끌어냈던 세계적인 시위에서는 수많은 예술가 외에도 ,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칼하인츠 슈톡하우젠과 죄르지 리게티 등 주요한 현대음악들이 참여했다. 그는 베를린으로 되돌아왔고 1971년 독일 시민권자가 됐다.

 

윤이상은 정치적 작곡가인가? 다양한 작품들, 유대인인 넬리 작스의 시를 작곡하고, '평화를 위해' 신포니, 혹은 오케스트라곡 '광주여 영원히'는 그런 예로 보인다. 윤이상의 가장 유명한 제자인 토시오 호소카와는 인터뷰에서 이에 대해서 반박했다.

 

'그의 음악은 전혀 정치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단지 그 개인이 항상 계속해서 정치에 관련되었죠.' 이 일본 작곡가는 말한다.

 

글리산도와 마이크로톤이 그의 특징을 만든다

 

윤이상은 그의 음악이 분단된 조국의 극복을 위한 기여로 해석되기를 원했고, 그것이 그에게는 중요했다. '일제강점기 시대에 그는 한국어를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고향은 항상 더 특별하게 중요했습니다.'


윤이상이 스스로를 '한국인'으로 인식하게 한 도구는 호소카와에게도 결정적이었다. 음 하나하나를 생명체가 태어나고, 자라고 또 죽는 것처럼 쓰는 것, 음을 그리는 데 서예처럼 아시아적 예술을 통해서 영감을 얻는 것. 이렇게 윤이상은 붓으로 음을 구별할 수 있었다. 굵거나 얇게 소리의 범위를 볼 수 있었다. 정교한 얇은 붓으로 옆 선을 그려 본 줄과의 차이를 그렸다. 글리산도와 마이크로톤은 그래서 그의 음악을 만들어낸다. 윤이상은 서예를 한국의 노래와 비교했다. '그것은 일본에서는 조금 다르게 느껴집니다. 한국에서는 배경이 더 중요한데, 글이 있는 뒷쪽의 흰색 부분, 음악적으로는 정적, 침묵으로 이해됩니다.'

 

이런 차이는 하지만 윤이상의 수업 이후에야 정말 명확해 졌다. '그가 한국 음악을 하기 위해서 어떻게 유럽의 작곡법에 몰두했는지, 그건 정말 하나의 표본입니다. 왜냐하는 저도 일본 음악을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주니어 윤이상'이 되려는 위험을 감수했고, 그래서 프라이부르크의 클라우스 후버에게로 갔습니다.

 

(중략)

 

윤이상은 베를린 예술대학에서 전세계에서 온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모든 이들이 그의 수업 방식에 적응하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같은 아시아 사람들에게는 부자지간 같은 관계였어요. 그리고 우리는 정말 순종적이었죠.' 그는 웃었다. 윤이상은 (수업에서) 정치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데, 딱 그 70년대에 자주 정치적 영향이 음악에 묻어났던 그 시절 서쪽 학생들은 이에 대해서 종종 혼란스러워했다.

 

6월 9일 세인트 엘리자베스 교회에서 열린 콘서트도 윤이상 삶의 정치적 측면을 주제로 했다. '100년의 내적 모순'이라는 주제로 베를린에서 살았던 작곡가의 영향을 되짚었다. 6월 22일 필하모닉에서 열리는 콘서트는 하늘과 땅, 남자와 여자, 자연과 인간의 간극을 그린 윤이상의 '거리'가 울려퍼진다. 9월 베를린 음악 축제에서도 윤이상을 주요 테마로 한 담론 행사와 콘서트가 열린다.

 

 

※ 기사 출처: http://www.tagesspiegel.de/kultur/begegnung-mit-einem-seiner-schueler-isang-yuns-100-geburtstag-mit-toenen-pinseln/1989795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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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명 : 이유진[독일/라이프치히]
  • 약력 : 현) 라이프치히 대학원 커뮤니케이션 및 미디어학 재학중 전)2010-2012 세계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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