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트 전체 검색영역
  • Twitter
  • Facebook
  • YouTube
  • blog

해외통신원

문화산업 현장의 가장 뜨거운 소식을 전문가들이 진단합니다.

우리나라 문화계의 가장 최신 소식부터 흐름 진단까지 재밌고 알찬 정보를 각 분야별 전문가들이 전합니다.

대중문화의 빛이 된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

  • [등록일]2022-01-18
  • [조회] 2006

대중문화의 빛이 된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





본 글의 목적은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이 형성될 당시 구성원들 간 공유되고 있던 가치관과 지향점이 무엇이었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또한 오늘날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의 대중화 요인과 사회문화적 의의는 무엇인지, 추후 한국 힙합의 확산은 어떻게 이루어질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는 것이다. 2장에서는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이 형성된 과정을 설명하고 그들의 가사를 분석하여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의 구성원들이 공유하였던 가치관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결과적으로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은 본토 힙합의 저항성을 수용하여 사회와 소통하고 서로의 가치관을 공유하였음을 논한다. 3장에서는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의 대중화 요인에 대해 거대 미디어의 영향, 매체 변화로 인한 문화 지형의 재편과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의 미디어 리터러시, 대중들의 취향 및 가치관의 변화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끝으로 한국 힙합의 세계화에 있어 한계점과 가능성에 대해 설명한다.

-----------------------------------------------------------------------------------------------------------------------------------------------------------------------


*메인 이미지 출처: @edwardolive/셔터스톡


1. 들어가는 말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이 시작된 지 어느덧 20여 년이 흘렀다. 정확한 시작점을 짚어내기는 어렵지만 1990년대 후반, 소수 마니아들을 중심으로 전례가 없는 하위문화가 형성된 것이다. 태생부터 자발적이고 능동적이었던 이 문화는 오랜 시간을 비주류의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것은 주류문화와의 헤게모니 다툼 끝에 얻어진 패배의 결과라기보다는, 자신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강화하고 유지하려는 시도로 보였다.


2021년 현재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은 한국 대중음악계의 주류 중 하나로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이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주류문화와의 타협을 통해 획득한 성취가 아니다. 거대 미디어의 영향력과 매체 변화에 따른 문화 지형의 재편, 대중들의 취향 및 가치관 변화 등 여러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본 글에서는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이 형성될 당시 구성원들 간 공유되고 있던 가치관과 지향점이 무엇이었는지 살펴볼 것이다. 또한 오늘날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의 대중화 요인과 사회문화적 의의는 무엇인지, 추후 한국 힙합의 확산은 어떻게 이루어질지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2.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의 정체성


필자는 한국 힙합의 성장 과정이 두 트랙으로 이루어져 왔다고 본다. 물론 현재는 트랙 간 경계가 모호해졌지만 문화가 시작되던 당시에는 뚜렷한 구분점이 존재했다. 첫 번째 트랙은 메인스트림(Mainstream) 힙합이 밟아온 과정이다. 일반적으로 한국어 랩의 시초는 홍서범의 <김삿갓>(1989)으로 간주된다. 이후 현진영,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가 보다 진일보한 랩을 들려주게 된다. 다만 장르적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 그들의 음악은 뉴 잭 스윙(New Jack Swing)의 형식에 가까웠으며, 당시 미국 본토의 힙합 씬에서 생산되고 있던 힙합 음악과는 거리감이 있었다. 하지만 90년대 중후반에 들어서며 서태지와 아이들의 <컴백홈(Come Back Home)>(1995), H.O.T의 <전사의 후예>(1996)와 같은 음악들이 본토 힙합에 근접한 사운드를 들려주기 시작하였다. 이후 업타운, 지누션 등 힙합 그룹을 표방하는 팀들이 다수 등장하며 한국 대중음악계에 힙합이 하나의 장르로서 안착하게 된다.



두 번째 트랙은 언더그라운드 힙합의 확장 과정이다. 레거시 미디어의 힘과 문화산업의 자본이 동력으로 작동한 메인스트림 힙합과는 달리 언더그라운드 힙합의 시작은 지극히 풀뿌리적이었다. 이미 알려진 대로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의 진원은 PC 통신상에서 이루어졌다. 오늘날 인터넷의 역할을 부분적으로나마 수행하던 당시의 PC 통신은 분산되어 있던 한국의 힙합 마니아들을 결집시켜주었다. PC 통신을 통해 결성된 대표적인 힙합 동호회는 ‘블렉스’와 ‘SNP’가 있다. 각각 1997년과 1999년에 결성된 이 동호회들은 홈 레코딩(Home Recording)으로 이루어진 음악을 서로 공유하고, 자체적으로 앨범을 제작하는 등의 창조적인 활동을 하였다. 당시 ‘블렉스’에는 MC메타와 주석, ‘SNP’에는 버벌진트와 피타입 등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 1세대 뮤지션들이 주요 멤버로 활동하고 있었다.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갈 점은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의 원형을 이루던 구성원들이 어떻게 힙합을 접하게 되었는가 하는 부분이다. 만약 그들이 이미 로컬라이징(Localizing)이 진행 중이던 메인스트림 힙합을 수직적으로 수용한 것이라면 한국 힙합의 성장과정을 투 트랙으로 설명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메인스트림 힙합과는 별개로 자체적인 루트를 통해 본토의 힙합 문화를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1995년 개국한 케이블 TV를 통해 전파된 미국의 힙합 뮤직비디오는 동호회 구성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1996년까지 존속되던 사전심의 제도로 인하여 미국의 힙합 음반은 국내로 수입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에 구성원들은 개인적으로 해외를 오가며 CD를 반입하는 보따리장수들을 통해 힙합 음반을 접할 수밖에 없었다. 1998년에 방영된 다큐멘터리 <KBS 제3지대? 너희가 힙합을 아느냐>를 살펴보면 1세대 랩퍼인 가리온의 MC메타가 음반 회사를 찾아가 정식으로 국내 발매가 되지 않은 음반들을 청취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듯 당시 힙합 동호회의 회원들은 PC 통신과 케이블 TV 등 당대의 선진적인 매체를 적극 활용하여, 일반 대중들보다 훨씬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태도로 자신들의 문화적 취향을 형성하였다.


PC 통신상에서 지펴진 불씨가 오프라인으로 옮겨지며 본격적인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 씬이 시작되었다. PC 통신 동호회의 구성원들은 신촌에 위치한 라이브 클럽인 ‘마스터플랜’에서 공연을 하기 시작하였다. 마스터플랜은 1997년 개장한 공연장으로 원래는 록, 테크노, 힙합 등 모든 장르의 뮤지션들에게 공연 기회를 제공하는 클럽이었다. 하지만 당시 힙합 공연이 가능한 공간이 많지 않았기에 공연을 원하는 다수의 래퍼들이 마스터플랜에 밀집하게 되었고, 그 결과 마스터플랜은 힙합 클럽의 대명사가 되어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의 중심지로 자리하게 되었다. 이후 2001년 마스터플랜은 공연장을 처분하고 본격적인 레이블의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로 인하여 필자는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의 형성기를 1997년부터 2001년으로 인식하고 있다.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이 한국의 메인스트림 힙합과 가장 차별화되는 지점은 바로 오리지널 힙합이 지닌 정서적 측면을 수용하고자 노력했다는 점이다. 1960~70년대 미국 뉴욕의 빈민 공동체에서 발생한 힙합 문화는 그 자체로 인종적·계급적 차원의 저항성을 지니고 있다. 록 힙합 음악의 근원이 길거리 파티에서 비롯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문화적 움직임은 사회·정치적으로 소외된 흑인청년들이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한 시도이기도 했다. 1980년대를 지나며 힙합은 흑인 커뮤니티를 대표하는 장르로 자리하게 되었고, 백인 주류사회의 압제를 폭로하기 위한 수단으로 적극 활용되었다. 형성기 당시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의 구성원들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한국 메인스트림 힙합은 본토 힙합이 지니고 있는 저항성이 배제된 형식의 문화였다. 그저 음악(장르)적, 패션, 댄스의 요소를 전략적 차원에서 하나의 스타일로 차용했을 뿐, 진정한 의미에서의 힙합은 시도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메인스트림에서 힙합을 표방하는 뮤지션들은 자본과 타협한 ‘가짜’로 취급되기 일쑤였고, 이러한 배타적 인식은 2000년대 중반까지도 강하게 이어졌다. 어쩌면 2018년 즈음 불거진 저스디스와 딥플로우의 디스전은 이러한 인식이 현 시점에도 잔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겠다.



한편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이 오리지널 힙합에 내포되어 있던 저항적 정서를 수용하고 한국적으로 재해석하려 시도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발표한 음악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필자는 형성기 당시의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 구성원들의 가치관을 알아보고자, 당시에 발표된 음악들에 대한 분석을 시도한 바 있다.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 뮤지션들에 의해 1997년과 2001년 사이에 발표된 노래들 중 총 283곡을 선정하여 가사의 주제를 분석한 결과 모든 곡들이 총 13개의 주제로 분류되었고, 그 중 저항과 비판을 주제로 한 곡(41곡), 자아실현을 주제로 한 곡(36곡)이 가장 많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 언더그라운드 힙합 뮤지션들의 주된 저항의 대상은 기성세대와 그들의 가치관이었다. 구체적으로는 학벌주의를 조장하는 기존 교육제도(갱톨릭의 <변기 속 세상>(1998), 크루시 픽스 크릭의 <How High School>(2000) 등), 정치권의 부정부패(블렉스 <거짓>(1999), 다 크루 <City of Soul>(2000) 등), 거대자본과 물질만능주의(O.D.C <서울부르스>(1999), CB Mass <나침반>(2000)> 등)에 대한 비판이 이루어졌다. 또한 당시 뮤지션들은 힙합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수호하고 기성세대 및 사회의 주된 가치관과의 타협을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블렉스 <Blex>(1997), 주석 <정직한 거울>(2000) 등).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 뮤지션들의 이러한 태도는 오리지널 힙합에 내재되어 있던 저항성을 당시 한국의 상황에 맞게 수정하여 받아들였음을 말해준다. 앞서 거론하였듯 본토 힙합의 저항이 인종적·계급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면,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의 저항은 세대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측면이 크다. 물론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에서도 계급과 관련된 담론이 등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규탁 (2011)이 지적하였듯, 한국의 힙합 문화가 중산 계층을 중심으로 시작된 것임을 고려한다면 빈민가 태생의 미국 힙합이 보여주었던 계급적 차원의 저항과는 다른 맥락으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1990년대 후반 당시 한국사회는 갑작스러운 외환위기로 인해 대혼란을 맞이했다. 무너진 경제상황 속에서 당시 청소년-청년들은 기성세대의 실패를 목도하며 그들이 물려주고자 했던 가치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이는 경제적 계층과는 무관하게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고, 이러한 보편적 감정을 공유하는 이들 중 일부가 힙합을 통해 기성세대를 향해 문제제기를 한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타당하다.


결론적으로 형성기 당시의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은 본토 힙합에 내재된 저항성을 자신들의 상황에 맞게 전유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힙합을 통해 사회와 소통하고 서로 간의 가치관을 공유하였다. 이 과정에서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의 독립적 정체성이 획득되고 문화적 영역이 구축되었다. 서두에 언급한 바와 같이 이러한 독립성으로 인해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은 문화적 변두리에 오랜 시간을 머물러야만 했다. 하지만 현재는 주류문화의 한 카테고리로 자리한 듯하다. 그렇다면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은 이미 독립적이고 저항적인 정체성을 포기한 것일까? 다음 장에서 답을 찾아보도록 하자.


3.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의 대중화


‘한가득 음악에 대한 열정을 품어도 한 가닥 하는 형제 하나 없는(데드피 <Mephisto>(2004))’ 곳으로 묘사되던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 씬은 ‘반지하에 살던 놈이 땅을 보러(노스페이스 갓 <복덕방>(2020))’ 다닐 수 있게 만들어주는 곳으로 변모했다. 메인스트림 무대라고 할 수 있는 공중파의 음악 프로그램이나 예능 등에 거의 노출된 적 없는 팀 ‘호미들’은 한 유튜버의 채널에서 2021년 한 해 동안 벌어들인 수입이 약 18억 원에 달하고 있음을 밝힌 바 있다. 힙합 레이블 앰비션 소속의 창모는 2020년 발표한 곡 <메테오>를 통해 2020년 1월 월간 차트 1위, ‘제35회 골든디스크 어워즈’ 베스트 R&B 힙합 부문 수상 등의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국내 최대 음원 사이트인 ‘멜론’이 제공하는 차트 상위권에 소위 ‘언더그라운드 래퍼’로 분류될 수 있는 뮤지션의 음악이 올라오는 것은 이제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렇듯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은 한국 대중음악계의 주류 장르로 안착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이 현재의 위상을 가질 수 있게 된 요인은 무엇이었는가?


세 가지 요인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첫째는 거대 미디어의 영향력이다. 지난 12월 《Mnet》의 <쇼미더머니(Show Me The Money)>의 10번 째 시즌이 종영하였다. 사실 <쇼미더머니>가 장수 프로그램의 반열에 들어서게 될 것을 예측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기념비적인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평가될 동사의 <슈퍼스타K>조차 <쇼미더머니>보다 짧은 수명을 기록하고 막을 내렸다. 물론 <쇼미더머니>가 여기까지 오는데 평탄한 길만 걸어온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논란과 비판에 휩싸인 바 있었고, 사람들의 관심이 줄어드는 상황을 거치기도 하였다. 하지만 <쇼미더머니 10>이 종영한 지 한 달이 되어가는 시점에도 멜론 차트 10위권에 관련 음원 5곡이 랭크되어 있는 상황이다. 여전히 <쇼미더머니>는 한국 힙합과 한국 대중음악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사실 <쇼미더머니>는 방송의 흥행을 위해 논란이 될 만한 요소들을 부각하여 한국 힙합에 부정적 이미지가 덧 씌워지는데 일조하기도 하였다. 필자 역시 <쇼미더머니>가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이 지닌 진정성을 희석시키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쇼미더머니>가 한국 힙합에 막대한 기여를 한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쇼미더머니>의 방영 시즌엔 한국 힙합이 한국 문화계에서 화제의 중심에 서게 된다. 동시에 언더그라운드 힙합 뮤지션들이 대중들에게 노출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이번 시즌 10을 통해서도 조광일, 머드 더 스튜던트, 비오 등의 뮤지션들이 인지도를 확보하였다. 이와 더불어 쿤타, 베이식과 같은 기억에서 잊힐 뻔한 뮤지션들을 다시 대중 앞으로 호출해내기도 하였다. 이렇듯 <쇼미더머니>는 언더그라운드 래퍼들에게 도약을 위한 발판이 되어줌으로써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이 영향력을 확장하는데 기여하였다. 다만 한국 힙합이 지나치게 <쇼미더머니>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이기에, 프로그램 종영 이후에 대한 대비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요인은 매체 변화로 인한 문화 지형의 재편과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의 미디어 리터러시다. 유튜브의 트렌드 매니저인 케빈 알로카(Kevin Allocca)는 자신의 저서 《유튜브 컬처》에서 전 세계가 유튜브에 열광하는 이유에 대해 밝힌 바 있다. 그 중 하나는 유튜브가 틈새/하위문화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기여한다는 점이었다. 과거 미디어는 제한적이고 선택의 폭도 넓지 않았다. 따라서 대중들은 레거시 미디어가 제공하는 선별된 문화를 일방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늘날은 다르다. 유튜브를 포함하여 다양한 미디어 채널과 SNS를 통해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다양한 콘텐츠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2010년대 초반 스마트 폰의 대대적인 보급과 맞물려 폭발적인 변화를 몰고 왔다. 이로 인하여 언더그라운드 힙합을 포함한 다양한 하위문화들이 수면 위로 올라올 수 있게 되었다. 이와 연결하여 주목할 필요가 있는 부분은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이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던 ‘미디어 리터러시’다. 형성기부터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의 구성원들은 다양한 미디어를 읽고, 다루고,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PC 통신을 통해 공동체를 형성했고 각종 미디 장비와 소프트웨어를 통해 음원을 제작할 수 있었다. 또한 개인적인 노력을 통하여 랩 가사를 쓸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러한 능력은 뮤지션을 전업으로 하지 않고 있는 일반 구성원들에게도 보급되었다. 2000년대 초반 당시 일반 구성원들은 ‘밀림’, ‘정글 라디오’와 같은 음원 공유 사이트에서 각자의 작업물을 공유하고 상호 평가하기도 하였다. 2000년대 중반을 넘어서며 그 주 무대는 ‘사운드 클라우드’로 옮겨갔다. ‘사운드 클라우드’는 프로페셔널 뮤지션부터 아마추어 래퍼들까지 자신의 창작물을 공유할 수 있는 무대이자 신인들의 등용문으로도 기능하였다. 다른 예를 살펴 볼 것도 없이, 매년 개최되는 <쇼미더머니> 예선에 만 명 안팎에 지원자가 참여한다는 사실만 보아도 한국 힙합이 지닌 미디어 리터러시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다.


이렇듯 뛰어난 미디어 리터러시를 보유하고 있던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의 구성원들은 일반 대중 및 기타 하위문화 구성원들보다 매체 변화에 능숙하게 적응할 수 있었다.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던 능력을 기반으로 자신의 작업물을 공유하는 것은 물론, 자신이 좋아하는 래퍼들의 작품을 2차 창작하여 온라인에 공유할 수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이 확산되고 축적됨에 따라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 콘텐츠가 대중들에게 더 많이 노출되었고, 이를 소비하는 향유자들이 증가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 번째 요인은 대중들의 취향 및 가치관의 변화이다. 음악평론가 김봉현은 힙합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나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태도라고 언급한 바 있다. 필자 역시 한국 힙합의 기저에 이러한 태도가 깔려있다고 생각한다.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은 형성 당시부터 본토 힙합의 저항정신을 수용하였고, 이는 배타적이고 비타협적인 태도로 이어졌다. 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면 고립을 지향하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긍정적으로 본다면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지키려는 모습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오늘날의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에게도 계승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러한 부분이 오늘날 청소년과 청년 청자들의 문화적 욕구와 부합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최근 ‘MZ 세대론’이 사회적 담론으로 대두되고 있지만 막상 당사자인 1980~2000년대 생들은 이를 달가워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는 별개로 현 청년 세대가 개인주의를 지향하고, 수직적 관계보다는 수평적 관계를 지향하며,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데 자유롭다는 분석은 타당해 보인다. 이러한 성향을 지닌 그들에게 힙합에 내재된 ‘나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의 태도는 매력적인 요소로 다가왔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쇼미더머니5> 우승자인 비와이의 경우, 자신의 무대에서 노골적으로 종교적인 색채를 드러냈으나, 대중들은 거부감 없이 그것을 수용하였다. 이는 대중이 그의 종교를 선호하기 때문이 아니라, 지극히 대조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신념을 선언하는 모습에 카타르시스를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2010년대 이후 힙합의 주요 키워드로 떠오른 ‘스웨그(Swag)’와 ‘플렉스(Flex)’가 활발히 소비된 것 또한 유사한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주변의 시선을 개의치 않고 자신의 성취를 전시하고 과다한 소비를 죄악시 하지 않는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은 청년 세대들에게 대변자의 기능을 일정 부분 수행하였다.


과거 필자는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이 ‘스웨그’와 ‘플렉스’로 물드는 것에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오랜 힙합 팬인 본인에게는 그러한 움직임이 한국 언더그라운드가 본래 가지고 있던 고유의 태도를 저버리고 타협의 길로 가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관점을 달리한다.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은 과거나 지금이나 ‘나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의 태도를 유지하며 일부 청년 세대들을 대변하고 있다. 다만 대변하고자 하는 공동체의 담론이 교체되었을 뿐이다.


과거에는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이 지니고 있던 비타협적 태도로 인해 대중들의 시선을 받지 못하였다면, 오늘날 대중들은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이 지니고 있는 비타협적 태도에 매력을 느낀다. 이것이 바로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이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의 다른 반응을 유도해낼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이다. 한국에서 언더그라운드 힙합은 ‘태도’로 계승되고 있다.


4. 나가는 말: 한국 힙합의 세계화 가능성


한국 힙합이 국내에서 메이저 장르로 자리함과 동시에 케이팝의 세계적 확산이 진행되는 모습을 보이자 속칭 ‘K-힙합’의 해외 진출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것은 아직 요원한 일로 느껴진다. 실제로 K-힙합이 미국 본토에 진출한 사례들이 존재한다. 2015년 키스 에이프의 <잊지마>와 2016년 디피알 레이블의 <응 프리스타일>이 미국의 대중들에게 좋은 반응을 이끌어낸 바 있다. 두 음악의 뮤직비디오는 유튜브에서 높은 조회수를 기록하며 한국 힙합 팬들로 하여금 ‘K-힙합의 세계화’를 꿈꾸게 하였다. 실제로 두 콘텐츠는 미국 현지에서 2차 콘텐츠로 재생산되며 본토의 대중들에게 소비된 바 있다. 다만 다음과 같은 명확한 한계점을 보이기도 하였다. 첫 번째 한계점은 두 콘텐츠 모두 미국 힙합 뮤지션의 작품을 오마주한 것이라는 점이다. 두 번째로는 <잊지마>의 원작자 격인 오쥐 마코(OG Maco)가 키스 에이프에 대해 상당히 보수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다. 이는 흑인 커뮤니티가 한국 힙합에 대해 가지고 있는 문화전유에 대한 경계일 가능성이 있다. 세 번째 한계점은 2차 창작 콘텐츠인 <잊지마 리믹스>와 <제이슨의 테마>에 나타나는 한국 힙합에 대한 타자화이다. 필자는 과거 두 콘텐츠를 분석하며 한국의 힙합을 경계선에 걸친 문화로 간주하는 본토의 시선이 내포되어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마지막으로 두 콘텐츠 이후 미국 내에서 큰 화제를 형성한 K-힙합 콘텐츠가 부재하다는 한계점이 존재한다.



이러한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필자 역시 다른 힙합 팬들과 마찬가지로 K-힙합의 세계화를 고대하고 있다. 객관적으로 평가해도 음악적 수준은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다만 케이팝의 성공이 반드시 K-힙합의 성공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어찌 보면 현재 미국 내 케이팝의 성공은 단순히 방탄소년단의 개별적 역량에 따른 성취일 수도 있다. 그렇게 본다면 케이팝의 미국 진출 역시 아직은 먼 이야기일 수 있으며, 그보다 후발주자인 한국 힙합 역시 세계화를 논하기엔 아직 이른 단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사회의 작은 하위문화였던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이 문화적 영역을 확장하였듯, 언젠가는 한국 힙합이 물리적인 울타리를 횡단하여 타 문화권에서 활발히 소비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물론 그 때의 한국 힙합은 지금과는 또 다른 담론과 형식으로 우리를 대변하고 있을 것이다.



참고자료

김태룡 (2015).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의 형성과정과 향후과제. 《다문화콘텐츠연구》, 18호, pp. 297-325.
김태룡 (2017). <쇼미더머니>를 통해 본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의 현재와 향후과제. 《통일인문학》, 71권, pp. 139-167.
김태룡 (2019). 트랜스컬처의 관점으로 본 한국힙합의 확장 가능성과 과제. 《대중음악》, 24권, pp. 37-63.
이규탁 (2011). 한국 힙합 음악 장르의 형성을 통해 본 대중문화의 세계화와 토착화. 《한국학연구》, 36권. pp. 59-84.
Allocca, K. (2018). Videocracy: How YouTube is Changing the World... with Double Rainbows, Singing Foxes, and Other Trends we Can’t Stop Watching. 엄성수 (역) (2018). 『유튜브 컬처』. 스타리치북스.
KBS실험실 (1998. 12. 21.), “(현장르포 제3지대) 너희가 힙합을 아느냐 (feat DJ DOC 업타운 김진표) [오감실험]”, https://www.youtube.com/watch?v=BSP9rZJX3A4


글ㅣ김태룡 경희대학교 K컬처·스토리콘텐츠연구소 학술연구교수

     (출처 : 한류NOW 2022년 1+2월호)